배움블로그2011. 8. 24.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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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경험주의자들 중에서 철학적으로 가장 깊은 영향을 남긴 데이비드 흄(David Hume, 원래는 Home)은 1711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Edinburgh)에서 태어났다. 에든버러는 1708년 잉글랜드에 병합되기 전까지 왕국 스코틀랜드의 수도였으며, 흄과 교우관계를 맺었던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활동하던 곳으로서, 흔히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본거지로 알려진 아름다운 도시다.

흄은 어린 시절부터 문학, 역사 그리고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철학책을 탐독하면서 12세가 되기 전(10세라는 설도 있다!), 형을 따라 에든버러 대학에 들어갈 정도로 인문학적 소질이 뛰어났었다. 집에서는 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흄은 철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였다. 그의 주저 중의 하나인 [인간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 3권은 1734~1737년 프랑스에 체류 중 준비하여, 영국에 돌아와 1739~1740년에 출판하였다. 흄은 자신의 주저를 불과 23살에 시작하여 29살에 끝낸 것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책을 출판하였다는 것보다 철학의 거인 칸트를 ‘도그마의 잠’에서 깨우고, 이후 과학철학의 시초, 논리실증주의의 원형으로 알려진, 지식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하였다는 점이 더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흄은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사고의 새로운 장’이 그에게 열렸다고 믿으면서, 기존의 철학이 갖고 있는 문제점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판단력이 있는 배운 사람이라면 최고의 신뢰를 받으면서, 정확하고 심오한 추론이라고 자부하는 체계가 얼마나 허약한 기초에 놓여 있는지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단지 믿음에 기초한 원칙들, 이로부터 서투르게 끌어낸 결론들, 정합성이 부족한 부분들, 확실성이 결여된 전체 등은 가장 저명한 철학자의 체계 여기저기에서 접할 수 있으며, 철학 자체를 불명예스럽게 만들고 있다. ([인간본성론] 서문)

철학자의 윤리가 근거 없는 주장의 비판과 정당화의 시도에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올바른 지식이란 과연 무엇인가?’는 실로 오래된 철학의 주제에 속한다. 그렇다면 흄이 비판의 칼을 갈아서 새로운 철학의 장을 열겠다고 했을 때, 그는 어떤 원칙에서 출발하였을까?

인간에 대한 과학이 다른 과학의 유일하고 견고한 토대가 되듯이, 인간에 대한 과학에 우리가 부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견고한 토대는 경험과 관찰에 근거해야 한다.

흄은 경험을 지식의 유일한 토대라고 보는 경험주의의 입장에서, 바로 인간의 경험에 필수적이라 보이는 귀납논증과 인과관계의 필연성이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점을 보일 수 있었다. 우선 ‘귀납논증의 문제(problem of induction)’라고 알려진 것부터 살펴보자.



18세기,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모습. <출처: wikipedia>

흄에 의하면 귀납논증은 ‘관찰된 사실로부터 관찰되지 않은 사태의 추론’을 의미하며, 그것은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감각과 기억을 넘어서는 행위’라고 비판한다. 감각과 감각의 기록을 의미하는 기억, 즉 경험의 뒷받침이 없는 지식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경험주의자라면 응당 귀납논증의 정당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귀납추론이 갖고 있는 중요성이다. 지금은 과학의 방법론을 꼭 귀납논증에서 찾고 있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자연과학이란 제한된 실험과 관찰을 통해 일반적인 자연법칙을 발견하는 귀납논증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자연과학이 자연의 진리를 발견하는 유일한 통로임에도 불구하고 귀납논증의 정당성이 부정된다면, 인간은 ‘원칙적으로’ 자연의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결론을 피할 수가 없다. 따라서 흄이 귀납논증을 비판한 이래 지금까지 거의 300년 동안 수많은 철학자와 논리학자들이 귀납논증에 연역논증이 갖는 수준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를 하여왔음은 물론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시도가 예외 없이 항상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거지논법(begging the question) 즉 순환논증에 빠지고 만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자연과학이란 제한된 실험과 관찰을 통해 일반적인 자연법칙을 발견하는 귀납논증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출처: NGD>


귀납논증을 구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자연이 지금까지의 진행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한다는, 이른바 ‘자연의 제일성(齊一性, uniformity of nature)’을 가정하는 것이다. 자연의 제일성을 귀납논증에 추가한다면 쉽게 그 정당화가 가능하다. 문제는 자연의 제일성이란 바로 귀납논증의 정당성과 내용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이다.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귀납논증을 경험주의의 입장에서 정당화하려는 또 다른 시도는 귀납논증이 잘 작동하고 있다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경험이 바로 귀납논증을 포함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귀납논증으로 귀납논증을 정당화한다는, 즉 ‘대상과 수단의 동일성’으로 인해 이 시도 역시 원위치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동양의 속담에 ‘손가락이 모든 것을 가리켜도 자신을 가리키지는 못한다’는 방법론적 순환에 대한 경고가 여기에 적용될 수 있다.

결국 ‘매일 새벽 6시 종이 울리면 먹이를 받아먹게 되자, 귀납논증을 통해 ‘새벽 6시 종 → 식사시간’이라는 결론을 내린 천재 칠면조가 어느 날 새벽 6시 종이 울리자 먹이를 받는 대신 목이 잘렸다’는 러셀식 우스개가 현재 귀납논증의 상황을 말해 주고 있는 셈이다. 바꿔 말해 흄에 의하면 관찰된 규칙성(regularity)만으로는 귀납논증을 정당화 할 수 없으며, 귀납논증은 다만 인간의 마음이 형성하는 습관(custom)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귀납논증의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인과관계의 필연성에 대한 흄의 비판이다. 여기서 흄이 말하는 경험의 내용을 약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흄에 의하면 인간이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세계를 경험할 때, 우선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인상(impression)을 받게 된다. 이 인상은 직접적인 만큼 강렬하고 생동적이다. 다른 한편 인상은 인간의 마음속에 관념(idea)을 남기게 되는데, 이 관념은 인상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흐릿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인과관계가 원인(cause)이라는 사건유형(e vent type)과 결과(effect)라는 사건유형과의 관계라는 점, 그리고 원인이 선행하고 결과가 후행한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보고 흄의 비판을 살펴보자. 우선 흄은 인과관계를 인간이 결코 선험적(a priori)으로, 즉 인상들의 논리적 포함관계로부터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한다. 실제로 어떤 신약이 특정 질병에 효과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논리학자가 아니라 임상의학자이다. 즉 경험에 의해서 인과관계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떤 사건유형을 다른 사건유형의 원인이라고 간주하더라도 원인에 이어 결과가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함축한다. 한 마디로 인과관계의 파악에 있어서 두 사건유형을 우리는 서로 독립적인 존재로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처럼 독립적인 존재들 간의 관계를 ‘외재적(external)’이라고 불렀으며, 인과관계는 이런 점에서 외재적 관계다.)

인과관계를 추정하기 위한 조건은 반복을 의미하는 규칙성이지만, 여기서 인과관계의 필연성은 논리적으로 확보가 불가능하다. <출처: NGD>

추론이 아니라면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관찰, 즉 경험에 의거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인과관계를 직접 관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의 시간적 양상에 의해 원인이 존재할 때는 결과가 없고, 결과가 존재할 때는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과관계를 두 사건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상상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추론에 의해서도 관찰에 의해서도 아니라면, 도대체 인간은 인과관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흄의 결론은 귀납논증의 경우처럼 습관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즉 특정한 사건에 이어서 또 다른 특정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반복되면, 우리의 마음은 습관적으로 이 두 사건의 유형으로부터 받는 인상들과 이에 상응하는 관념들을 결합하여(associate), 즉 투사(projection)하여 인과관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흄의 비판이 있기 전까지는 인과관계는 필연적 연결(necessary connection)로 간주되었지만 이제 인과관계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한편 인과관계의 필연성을 확보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인과관계를 개별사건(event token) 간의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다. 인과관계를 추정하기 위한 조건은 비슷한 사건들의 반복을 의미하는 규칙성이지만, 이 경우 인과관계의 필연성은 논리적으로 확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인과관계가 단순히 반복에 의한 규칙성과 다르다는 점에서, 즉 원인이란 인과력(causal power)을 갖는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런 경우는 어떤 비판이 가능할까?

개별사건간의 인과관계란 오로지 사후에만 판단된다는 점에서 두 사건이란 실은 하나의 사건을 분할한 것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때 확보된 필연성은 두 사건이 다시는 반복될 수 없다는 점에서 독립성의 상실에 기인한다. 파르메니데스적 일자(一者, the Oneness)가 돌아온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전체의 분할에서 생기는 상호의존적, 필연적 관계를 ‘내재적(internal)’ 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흄의 귀납논증과 인과관계의 필연성 비판은 칸트에게 ‘지식의 원천은 오로지 경험에 있을 뿐이지만, 경험이 곧바로 지식은 아니다’라는, 이른바 철학의 인식론적 전회(轉回)를 가져왔으며, 형이상학을 배제하고 인간의 지식체계를 경험의 의한 검증가능성에 기초하려는 20세기 논리실증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러나 생전에는 철학자로서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영국의 역사(History of England)] 6권을 지은 역사가로서 더 알려진, 그리고 대학에는 한 번도 자리를 얻지 못한 ‘흄의 회의’에 대한 구조적 이해는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흄의 인과관계의 필연성 비판은 구조적으로 볼 때 사실 인과관계에만 국한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비판의 핵심을 조금 더 일반화시키면 ‘독립적으로 도입된 어떤 존재들 간에도 필연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두 존재간의 필연성 확보란 사실 ‘하나의 존재를 두 부분으로 분할하여 경계를 그었지만 두 부분이 만나고 있다’는 것과 동일하다.(파르메니데스의 귀환!) 다빈치의 물과 공기의 경계, 연속개념, 극한, 무한소의 이중성, 인과관계의 필연성 비판 등은 어쩌면 동일한 구조적 문제에서 출발하는 친족들일 가능성이 있다.

  1. 귀납논증

    귀납논증(inductive argument)를 흔히 개별명제로부터 일반명제를 끌어내는 추론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귀납논증의 한 예일 뿐이다. 귀납논증은 연역논증(deductive argument)과 대비하여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논증이란 전제들로부터 결론을 끌어내는 행위이며, 이때 전제들이 모두 참일 경우 결론도 ‘반드시’ 참인 논증을 연역논증이라고 하며, 전제들이 모두 참이더라도 결론이 참이 아닐 수 있는 논증, 혹은 ‘아마도’ 참일 수 있는 논증을 귀납논증이라고 한다. 따라서 연역논증이 진리보존적이나 지식비확장적인 반면에, 귀납논증은 진리비보존적이나 지식확장적인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여론조사나 유비추리는 귀납논증에 속한다. 참고로 수학적 귀납법(mathematical induction)은 그 명칭과는 달리 연역논증에 속한다.

  2. 인식론적 전회

    인식론적 전회(epistemological turn)란 서양철학사에서 철학의 주요 관심이 존재론 즉 형이상학으로부터 인간이 획득한 지식의 본질로 크게 바뀌는 것을 말한다. 즉 고대와 중세를 지배했던 실재론(realism)에 대하여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그 실재성을 확보하려고 했던 데카르트의 『성찰』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지식 중에 선험적(a priori) 가능성을 천명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획을 그은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인식론적 전회를 통해 과거 존재론과 인식론의 구별이 근거 없음이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존재론과 인식론의 등가성에 대하여는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홍성기 / 아주대 기초교육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대학교 철학과 석사, 자르란트대학교 철학과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현 아주대학교 기초교육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용수의 논리], [불교와 분석철학], [시간과 경계], [고전 논리학과 대화 논리학]이 있다.

발행일 2010.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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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재속에는2011. 7. 16.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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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탄생다빈치에서파인먼까지창조성을빛낸사람들의13가지생각도?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 인문교양
지은이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에코의서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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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내 서재속에는 이라는 코너를 5개 분야로 나눠서 개제할 생각입니다. 우선 우리 몸에 필요한 5대 영양소라는 것을 착안해 독서도 5대 영양소로 분류해 올릴 예정입니다.
 탄수화물은 먹으면 기운나고 필요하지만 많이 먹으면 지방처럼 비만의 위험이 있는 책입니다.
 단백질은 근육을 만들고 필요한 것이므로 금융에서 필요하면서 다소 어려운 책을 위주로 개제할 것입니다.
 지방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책. 물론 독서를 함에 있어서 나쁜 책은 없다고 하지만 주식투자에서는 제태크 서적이나 기술적 분석으로만 된 책을 중심으로 적을 생각입니다. 너무 안 읽어도 안좋으니 종종 읽어봐야겟죠?
 무기질 생각의 균형을 잡아주는 분야로 철학이나 금융 밖의 분야로 예를 들어 천문학이나 과학책으로 꾸밀 예정입니다.
 비타민은 필요하고 많이 읽으면 좋은 서적으로 꾸밀 생각입니다.
 
 5개 분야로 분류해서 블로그 독자들로 하여금 좀 더 필요한 책을 알려드리고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 이제 생각의 탄생이라는 무기질 같은 책으로 들어가볼까요?

'책과 씨름을 한다'라는 느낌을 잘 몰랐다. 스스로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책과 멀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다 우연이 학기가 시작하면서 '창의적 문제해결력'이라는 수업을 듣게 되었다. 아마도 학교를 다니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을 수업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죽은 지식, 암기적 지식을 배우는 것을 넘어선 아이디어 낚시법을 배우는 것이다. 교수님들 또한 기업 일선의 상황을 너무나 잘알고 생생히 학생들에게 전달해준다는 점이다. 이 책을 집게 된 것은 참고도서로 수업에 더 생생하게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중간 중간 읽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어느새 사라지고 책과 책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찼다.

 

 - 왜? 생각도구가 필요한가?

 최근 스마트폰이 각광을 받고 있다. 스마트폰은 두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software와 hardware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컴퓨터,IT 분야에도 적용되고 심지어 사람에게 까지 적용할 수 있다. 사람의 발상은 자연에 구조를 본따서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software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틀(paradigm)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고틀은 스스로 주체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상사에서 많이 논하겟지만 대게 새롭지 않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시장주의, 권위주의와 같은 주의로 시작되는 것들이 녹아들어 자신의 관점과 생각을 좌우 하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신선한 아이디어를 내놓았을 떄 이미 시장에 나와있는 것이거나 시도된 경우가 많은 것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는 더 새로운 것,brand new한 것들을 원한다. 이러한 개인과 사회의 갈등 속에서 이 책에 소개된 생각도구들은 신선한 활로를 보여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도구는 오늘날 사회에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리처드 파인먼이라는 유명한 과학자는 수학문제를 푸는 것을 넘어 몸으로 느꼇다고 한다. 그리고 헬렌켈러의 경우 부족한 감각을 다른 감각으로 통합시켜 자신이 삶을 더 보람차고도 위대하게 살아냈다고 이 책은 전한다. 짧게 나마 책에 있는 생각도구를 나름대로의 정리로 올리려고 한다.

 

 1. 관찰

 내일 아침 지하철을 타고 학교를 간다. 나는 주의를 지켜본다. 앉아 있는 사람들의 50%는 자신의 휴대폰을 뚫어져라 보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리고 학생들 대부분은 자신의 전공서적을 펴놓고 시험공부를 하고 있다. 그들의 표정을 보면 따분하다는 표정과 무표정 그리고 대부분 눈을 감고 있다. 사회의 무기력을 느끼는 듯한 표정이다. 아침의 출근길은 너무나 따분해 보인다. 그렇다면 대중교통에 음악을 틀어주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최근 유행하는 뮤직테라피를 도입해서 사회적인 피로를 감소 시킬 순 없을까? 다양한 제안이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관심있어하는 주식시장과 금융시장을 보면 최근 상당한 물가 상승과 인플레이션 압박이 챠트와 지표상에 들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지표와 통계만으로 실물경제나 금융시장을 판단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다. 주의 사람들의 주식 시장에 대한 관심과 주변 친척이나 지인들이 '어느 주식을 샀다'라고 들리는 소문, 학교나 친구들의 이야기 속에 속속 주식투자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는 것은 지금 주식 시장이 상당히 상승했다는 반증이라고 알 수 있다. 주식이 계속 오르리라라는 상승과 부채를 이용한 투자는 주식시장이 위험하다고 알리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이 두가지 사례를 보고도 관찰이 생각의 탄생 그자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올바른 관찰 빠른 관찰이 없다면 사람은 질문에 엉뚱한 대답만 내놓은 계산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림 1 <이미지의 반역>,르네 마그리트 작, 1928-29

 

 현대 예술가들은 이러한 관찰에 대한 중요성을 말하기 위해 몇몇 작품을 내놓았다. 이러한 작품들은 "당신이 보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라. 그리고 자신이 가장 생각하지 않는 것들엑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해보라."라고 말한다.이러한 작품은 의외로 신성한 깨달음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라보는 세속적인 것들 ex)돈,컴퓨터,휴대폰 에대해 장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2. 형상화와 추상화

 이 책은 생각도구를 과정별로 나열해놓은 것 같다. 관찰 이후에 우리는 그 관찰한 것을 마음속으로 그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위의 형상화와 추상화가 필요한 것이다. 책을 잘 읽어 보면 이 두개의 관념어는 서로 다른 것처럼 분리 되어있지만 책을 읽고 난 다음 이 두단어를 보면 서로 같은 단어처럼 느껴진다. 이 두가지의 기능은 세계를 재창조한다라는 기능적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개의 단어는 방향성이 다르다. 우선 형상화는 마음속의 도화지에 세상에 바라본 것들을 그려서 채운다는 것이고, 추상화는 자신이 바라본 것들을 다른 사람 마음속 도화지에 채워 넣는 것이다.

 

 3. 패턴 인식 그리고 패턴 형성

 

벽의 복잡한 문양 속에서 형상들을 발견하는 것은 시끄러운 종소리 속에서 우리가 아는 이름이나 단어를 찾아내는 일과 같다.

 

<정원사>,주세페 아르침볼도 작 1590,그림을 꺼구로 보면 사람의 얼굴이됨.

 

바둑이나 체스를 둘 때 대게 어떤 진영과 모양이 되면 이길 수 있다고 프로기사들은 말한다. 일반인에게는 단순한 수의 열거지만 그들이 보는 형태는 너무나 판이 하게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패턴인식은 꼭 창의적인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물건을 관찷하고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패턴을 잘 보아야 되는 것이다. 마치 시험을 치기전에 앞글자만 외워 놓는 방식처럼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경제시스템을 체스의 말처럼 생각하고 종종 보기도 한다. 우선 기초가 되는 것은 폰이다. 폰은 개별기업 주가이다. 그리고 룩은 기업채권이다. 그리고 비숍은 외환시장이다. 나이트는 해외 주식시장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퀸은 GDP와 같은 거시경제지표이고 결국 중요한 것은 킹이고 이것을 국민경제(풍요)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는 개별 기업 주가와 회사채가 상당히 안정되어 있으며 외환시장 또한 안전하다. 반면 일본쪽의 해외 주식시장의 움직임은 우리나라 시장을 포함한 여러 시장이 상승한 것에 비해 횡보적인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 또한 GDP성장률은 물가 상승률이 가파르기에 실질 성장은 적을 것이다. 퀸이 위험하다는 것은 대게 폰과 룩,비숍이 안전하기에 대중들은 모르고 있다는 것이 나의 패턴 인식 결과 이다. 그리고 이러한 거시경제성장이나 개별기업 주가의 상승이 국민경제의 풍요로 이어지는 모습은 아직 확인하기 힘들고 심지어 중소기업으로의 트리클 다운이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을 생각해보았을때 이번 상승이후 폭락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 올 것이며, 이 피폭효과는 생각보다 클것이라고 생각한다.(거시경제,국민경제가 흔들리기에)

 그리고 역사속에 패턴 인식의 결과물은 판 구조론을 주장한 알프레드 베게너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패턴 인식을 넘어선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내는 능력도 있다. 비유를 하자면 여러가지 무늬가 있다 일자 무늬, 체크무늬, 물결무늬 와 같은 무늬 패턴을 겹치거나 중복 시켜보면서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패턴 형성의 시작이다. "단순한 패턴들을 병치시킴으로써 과학에서도 패턴형성을 흥미롭게 해볼 수 있다."

 

 4. 유추

 "사과를 땅으로 잡아당기는 힘이 있다면 이는 하늘 위로 계속 뻗쳐나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달까지도 끌어당길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해진다."-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

 

 19~20세기 부터 시작된 수학화는 어렴풋한 이론을 더 공고하고 객관적으로 검증가능하게 만들었다.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비추어 보았을 때 아르키메데스가 비중의 원리를 인식하고 유레카를 외칠때 수학적인 사고를 통해 인식하기보다 유추와 상상력에 의해 완성되었을 것이다. 유추라는 것은 직유와 다르다. A는 B이고 B는 C이다.즉,A는 C이다라는 것과 A와 B는 닮았다. 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198쪽을 펴보면 전반적으로 많은 철학자들은 유추를 비논리적이고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 것으로 평가절하한다. 그러나 오히려 유추가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것이기 때문에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들 사이의 다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불완전한 일치라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유추는 기존의 지적 도구로 도달할 수 없는 새로운 이해의 세계로 도약하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5. 몸으로 생각하기와 감정이입

 

 잭슨 폴록의 액션 패인팅 과거 대기업 CF의 광고가 이러한 예술가의 작품을 페러디한 것으로 기억한다. 잭슨 폴록은 자신이 작품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것을 느끼도록 관람자에게 해준다. 즉, 예술 작품은 단순히 '보다'라는 감각을 넘어서 몸으로 '느껴'야만이 예술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책 전반부에 나오는 아인슈타인과 파인먼은 문제를 몸으로 느끼며 풀었다고 말한다.

 감정이입은 이것을 몸으로 느끼는 관찰을 넘어서 경험으로 이끌어내는 더 차원높은 생각도구라고 볼 수 있다. 사냥에 성공하려면 사냥감처럼 생각하라 라는 오늘날 수렵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부족들의 이야기이다.

 

6. 차원적 사고

 무게와 공간을 한곳에 수렴시킬 방법을 찾아라. 모델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화가 브릿지라일라

 

 7. 통합,놀이

 통합과 놀이는 인간이 가진 특이점 중 하나일 것이다. 또한 이러한 것들이 필요한 이유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 철학자가 수학자이며 문학가이며 예술가였던 적이 있었다. 그로 인해 다양한 분야에서 해결책을 끌어오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오늘날 지식체계는 너무나 방대하고 복잡해짐에 따라 통합적인 사고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양한 발상법은 이러한 통합을 촉진시킬 수 있고 오늘날 학문이 가진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방향으로 흘러 갈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발상의 도구를 즐기며 활용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다.


 결론 : 당시에는 이 책이 유용하거나 창의성을 길러준다는 것을 체감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에 지나면서 생각의 도구를 이용하는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종종 모임에서도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어서 이목을 집중하기도하고 가장 좋은 것은 문제 상황에서 좀더 즐기며 좋은 해결실마리를 꺼내내는 데 이 책은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두껍고 힘들엇지만 그만큼 값진 책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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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