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블로그2013. 8. 20.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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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볼만 한 것, 사법시험에 도전
 
 호젓한 캠퍼스의 잔디 위에 누워 저 자신의 지난 날들을 반추하여 보았습니다.
밉기만 하던 교복입은 학생들, 당장 뒤집혀버리기만 바랬던 이 사회, 못나 보이고 원망스러웠던
부모님, 신을 저주하고 부정했던 나날들, 이 모든 것이 오늘의 제가 대학생이 될 수 있게끔 해준
소중하게만 느껴지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고 막막하기만 했던 것들이 하나 하나 풀린 것을 보면 어
떤 [절대자의 섭리]같은 것이 분명 있다고 믿어졌습니다.
오늘의 저를 있게 한 절대자의 뜻은 뭘까?
대학생활을 설계했습니다.
 
 대학 1학년 때에는 정규학교 생활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음미하기 위해 약간의 나이 차이는 있었
으나 자주 어울려 대화하고 미팅도 해보고, 술, 담배, 당구 등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대학 2학년이 되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저의 앞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한 이 사회에서 받은 도움도 만에 하나라도 환원해야 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선천적인 인맥도 금맥도 없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맨 몸뚱이 뿐이었습니다.
이 맨 몸뚱이를 가지고 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할 역할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해의식이 남달리 강한 사람들과 더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나 알찬 대학생활을
위해서나 한 번쯤 부딪혀보리라.
도약해보리라 사법시험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76년 4월 초, 방위소집명령서가 날아들었습니다.
저는 숙부님께 양자로 입적되어 있었고, 당시 숙부님 가족이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보충역으
로 편입되어 있다가 이번에 나온 것입니다.
먹루름이 끼는가 두웠습니다.
2학년이 되면서 운 좋게 맏게 된 외부 장학금은 액수가 많아 학비는 한시름 놓았다 했는데...

휴학을 하게 되면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은 뻔했으며 또한 복학이 걱정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름이 부름인지라 그 때 걱정은 그 때 하기로 하고, 일단 휴학을 하여 방위병으로 6개월
의 근무 끝에 76년 11월 말에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방위병으로 근무하면서부터는 남는 시간에 영어공부만하였습니다.
짧은 중, 고등학교 과정 때문에 영어 실력은 형편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는 여학생들의 눈초리가 여간 따갑지 않았으나 좀더 시간을 확보키 위해 일과가 끝나
면 방위병 복장을 한 채로 학교도서관으로 직행하여 영자신문과 TOEFL을 보았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적으로 하루에 2-3시간씩 공부한 덕분에 1차 시험에서 간신히 과라을 면할 수 있
는 실력이나마 갖추게 되었습니다.
77년 신학기 복학까지에는 3개월 정도의 시간이 있었으므로 그 동안에 학비조달을 염두에 두고
몇 군데 알아보았으나 여의치 못하였습니다.
기왕에 도전장을 마음 속으로 내놓은 터였기에 3개월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여 정식으로 77년 3
월의 19회 사법시험 1차에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뚜렷하게 사법시험 준비를 하는 학교 선배님이나 동료들이 거의 없었기에 별다른 얘기나 방법
론 등을 듣지 못하고, 책 선택도 합격기나 서점에서 많이 팔리는 책 위주로 하여 1차 전과목을 무
슨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겨우 1회독하고 시험장에 들어갔습니다.
막상 시험지를 받고 보니 확실한 답은 가려낼 수 업다 할지라도 알 듯한 단어들 이 눈에 많이 띄
어 소문처럼 어려운 시험은 아닌 듯 싶어 내년이면 1차 저옫는 가능할 것도 같아 가벼운 마음으
로 시험장을 나왔습니다.
 후에 시험성적을 알아보니 예상 외로 과락이 없어서 사법시험의 고지가 가깝게만 느껴졌습니
다.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그 뒤로 두 번이나 1차에 떨어졌습니다.
역시 자만은 금물인 모양입니다.

 77년 10월경 학교 측의 배려로 도서관 지하에 법학과 학생들마을 위한 조그만 방이 마련되었습
니다.
이곳에 한 자리를 얻어 제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5시 50분쯤 일어나 맨손체조 등을 하고 6시부터 7시까지 지금은 시간이 변경된 KBS라디오 영어
강좌를 들은 후 도시락 두 개를 싸들고 학교까지 걸어 가면 8시경, 점심먹고 1시간 정도 자고 저
녁 10시 30분경에 귀가하여 영어단어나 법전 조문을 조금본 후에 12시경에 자리에 누워 그 날
공부한 것을 미리 속에 그리다 보면 어느덧 잠에 빠지곤 했습니다.
 최대한의 시간 확보를 위해 하루 하루의 공부시간을 엄격하게 표시하였습니다.
별로 건강하지 못하던 몸이 었으나 이 때의 규칙적인 생활과 아침 저녁에 잠깐씩 하는 맨손체조
와 팔굽혀펴기, 30분 정도의 거리를 도보로 등,하교한 덕부에 오히려 건강해졌습니다.
또한 저녁에 자리에 누워 그 날 공부한 것을 머리에  떠올리가 보니 불면증으로 고생을 했던 기억
도 별로 없었습니다.

 78년 3월, 이번에는 기어코 붙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20회 1차에 응시했으나 영어에서 겨우 과
락을 면하는 낮은 점수와 80점이 너무 높은 커트라인으로 고배를 마셨습니다.
좌석에다 장담하는 구호까지 써놓은 터였기에 자신에 대한 실망과 함께 동료들을 대하기가 어색
했습니다.
77년 3월의 19회 응시로 1차에 대한 감을 잡았다는 것은 득이 되었으나 시건방지게 1차를 경시
한 탓으로 10월 말 시험공고가 날 때까지 느슨한 공부가 절대 패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번의 분패를 설욕한다는 계획으로 4학년 초에 1,2차
동시라는 터무니없는 설계를 했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그런대로 잡히는 듯하더니 얼마 지나고 나서는 2차 과목을 잡으면 머리에 잘 들
어오지 않아 불안했고, 1차를 잡으면 1,2차 동시라는 계획이 마음에 걸리고...
이럭저럭 하다보니 10월 말 또 시험공고가 났습니다.
그 때부터는 1차에 더 많은 투자를 하였으나 79년 3월, 21회의 결과는 또 한 번의 쓴잔을 저에
게 안겨주었습니다. 

 이제는 누구에게 말하기도 두려웠습니다. 제가 무엇을, 무슨 공부를 하는지도 알려 하지 않으
신 어머님이셨고, 공부에 관한 한 말씀 한 마디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러하신 어머님까지도 비록 무슨 시험인지는 잘 모르셨지만 이제 그만 했으면 하는 눈치를 보이
셨습니다.
학교에서도 제법 기대를 건다고 교수님들이나 학생들의 시선을 받아왔는데...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저 자신에 대한 회의가 엄습하였습니다.
이제 그만 물러서버릴까도 수없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투자해 놓은 것이야 아까울 것 없었습니다.
 원래 가진 것이 없는 놈이라서 잃은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제게는 아직 대학생활도 1년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
 1차부터 차근차근하게...
하늘을 보지않고 어떻게 별을 따겠는가.
1차에 합격하지 않고는 2차 시험장에 들어가 볼 수 조차 없지 않는가.
법학 전공에다 몇 번이나 도전했으면서 1차조차 못 붙고 그만 둔다면, 그리고 기회가 없다면 또
모르겠거니와 기회도 있는데 포기한다면 과연 앞으로 이룰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인생의 삶은 자기 자신이 사는 것이며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누가 대신 살아 주거나 남이 책임져 줄 성질의 것이 못된다.
 남이 어떻게 보든 기어코 하겠다.
한 인간의 삶의 [대차대조표]나 [손익계산서]는 죽을 때나 한번쓰는 것이지 어떤 순간마다 쓰는
것은 아닐 것이다.
처음에 중학교과정을 시작할 때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 약 8년이나 늦었는데 몇 년이 지난 오늘 날
은 비슷하게 되지 않았는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이 순간부터 다시 시작하자.

 이리하여 이번에는 1차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사실 법학과 학생이라면 1차와 2차를 구분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기본 3법은 1,2차 공통과목이고, 그 외 2차과목은 4학년 이전에 대부분 학교수업에서 다루어지
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2차는 의식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학기 동안에는 장학금이 걸려있었기에 시험기간 1주일 전부터는 학점과목을 하고, 여름방학에
는 비법률과목, 그 나머지 시간에는 기본 3법위주로 하였습니다.

 겨울 방학이 되면서부터 약 100여일을 3등분하여 1차 마무리에 들어갔습니다.
회독수는 중요시하지 않았습니다.
회독수를 남보다 적게 한것 같으면 불안하고 남과 같이 하고도 이해가 않 된 부분이 있거나 
남보다 떨어지면 자신의 실력에 회의를 가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전기간을 책의 두께와 재가 확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에 따라 적당히 배분하여 고루
고루 배정하였습니다.
 60여일 동안 영어는 매일 조금씩 하였으므로 이를 빼고 7과목을 적당히 배분하여 기본서를 1회
독하고, 곧바로 같은 과목의 문제점을 푸는 방법으로 1회독을 하고, 약 30여일 동안 기본서의 미
진한 부분을 보충하면서 다른 문제집을 한권씩 더풀었습니다.
그 후 약 10일 동안 매 과목당 하루 정도 배분하여 문제집 두 권에 표시되어 있는 틀린 문제와 중
요문제 위주로 전체적으로 살피고 마지막 시험 전 하루 이틀에 전과목을 두루 살핀 다음 곧 80년
3월 22회 사시 1차 시험장으로 향하였습니다.
 이미 2월에 대학을 졸업한 후였습니다. 운이 좋아서 전체 수석졸업의 영광은 안았으나 이것이
도리어 부담이 되었습니다.
명색이 수석 졸업생인데 1차마저 떨어지면 무슨 얼굴로 동문들을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막상 시험지를 받고 보니 경제학과 영어가 괴롭혔습니다.
영어는 10문제도 채 풀지 못했는데 학생들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고개를 숙인 탓으로 목은 아파오고 ...
 불안한 마음으로 취직과의 갈림길에서 책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던 중에 발표가 났습니다.
합격이었습니다.
참 오랫만에 들어보는 생소한 단어였습니다.
기뻤습니다. 2차는 준비하지 못하고 참가한 관계로 날 두 과목이 과락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년간 공부할 경제력이 문제였습니다.
여동생이 결혼한 후로 그 뒤를 이어 생활비를 담당했던 남동생이 4학년 말에 군대를 갔기에 이제
는 제가 나서야만 할 차례였습니다.
어머님의 삯일과 날품 팔이로는 한계에 와 있었습니다.
궁하면 통한다던가. 학생처장으로 계실적부터 장학금을 배려해 주신 박 길준 교수님의 소개와 법
학과 교수님들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재일교포 사업가로부터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고 후회스럽지 않을 1년을 보내겠습니다."

 장학금 덕분으로 2차 문제집과 참고서 등을 일괄 구입하였습니다.
이 무렵 고시잡지 4년분을 정성껏 모아 두었다가 아낌없이 건네 준 채 광기 형의 배려도 잊을 수
가 없습니다.

 5월 중순에 경기도 양평에 있는 보림사에 짐을 풀었습니다.
재학 중에도 방학 중에도 계속 학교 법률연구실을 이용했기에 학교도서실 외의 생활은 처음이었
습니다.
처음에는 좀 어색했으나 주위의 따뜻한 배려도 곧 익숙할 수 있었으며, 아침 6시 이전에 일어나
가벼운 조깅과 맨손체조를 한 후 책상에 앉으면서 오늘 하루도 성실히 보낼 것을 다짐하고 밤 12
시경 잘 때까지 빡빡한 계획으로 강행군을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에 한나절 정도는 쉬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친구들과 만나서 탁구를 치거나 가볍게 술을 마셨으나 이 곳에서는 냇가로 멱을
감으러 가거나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밤 깡소주를 마시며 물고기를 잡던 일,멱감으며 돼지고기 돌구이를
해먹던 일들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자제한다고 했으나 천성적으로 마음이 모질지 못하고 많이는 못 마셔도 술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날이 갈수록 시간확보가 줄어들었습니다.
후회스럽지 않을 1년을 보내겠다고 약속을 하지 않았던가.

 9월초, 정들었던 보림사를 뒤로 하고 10월에 신림고시원에 자리를 정했습니다.
기계적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머리에 남을 정도의 슬럽프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소위 슬럼프니 메너리즘이니 하는것은 불안과 초조에서 오며, 불안과 초조는 만조한 공부
를 못하는데서, 계획된 만족한 공부를 못하는 것은 자기의 정도를 넘는 무리에서 온다고 봅니
다.
경제력이 빠듯한데 어떤 형태로든지 무리하여 지출한다든가 하면 경제적으로 불안과 초조가 올
것이고, 체력이 한계가 있는데 너무 지나친 운동이나 음주 등으로 다음 날 영향을 미친다든가,
어떤 날 밤 공부가 잘 된다고 평소보다 밤 늦게까지 하여 그 다음날 영향을 미쳐 하루 양을 다 채
우지 못할 경우, 즉 하루를 만족스럽게 보내지 못했을 경우 불안과 초조가 오는 것 같고, 이것이
며칠 계속되다 보면 거기에서 헤어나오기 힘든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하루 하루를 무리하지 않고 규칙적으로 보내면서 몸에 피로가 오기 전에 일주일에 한나
절쯤 쉰다면 슬럼프니 메너리즘이니 하는 것도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닐 것 같습니다.
사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한 가지에 억세게 매어달리는 모양입니다.
검정고시 중학과정을 공부할 때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습니다.
 이 기간에 좋다고 자랑하던 시력이 뚝 떨어져 안경을 끼기 시작할 정도로 악착같았습니다.
이 순간은 저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9개월만 공부하겠다고 해놓고 대학까지 졸업했으면서 그것도 부족하여 공부를 하고 있었으니까
9년이 되었습니다.
꼭 붙어야만 했습니다.
 여러 편의 합격기에서 공부방법을 요약하여 나의 생활에 맞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6월 말까지는 2차 전과목을 목차 위주로 일별하였습니다.
7월부터는 각 과목마다 기본서를 읽고 참고서를 참고한 후 다시 기본서를 보는 방법으로 하여 예
정보다 늦은 11월 말까지 국민윤리와 헌법을 제와한 전과목을 1회독하였습니다.
2회독 이상의 효과는 충분했으리라 봅니다.
 이 때에 고시잡지 목차와 예상문제, 기출문제, 채택문제 등을 해당과목 해당부분에 전부 표시하
여 중요도를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중요한 문제가 여러 번 다루어졌을네니까. 12월부터는 국민윤리, 헌법, 행정법을 제외
하고는 문제집을 보면서 기본서의 자료를 모두 문제집에 옮겼습니다.
고시잡지의 중요 논문이나 모범답안 등도 참고 하였습니다.
 2월까지 그 작업을 마치고 2월 말경부터 국민윤리와 헌 법을 공부하였습니다.
3월 말부터 4월까지 다시 전과목 1회독을 하려 했으나 채 끝마치지도 못하고 마지막 4일을 맞았
습니다.
 "나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여 주소서!"

 하루에 2-3시간씩 자면서 최선을 다하려 하였습니다.
뚜렷하게 잘 치렀다는 과목은 하나도 없고 [민소법]과 [형소법]이 특히 마음에 걸렸습니다.
5월 8일, 어버이날이 마지막 시험날이었습니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 언제나 한결같이 성실한 자세로 진지하게 살아오신 어머님 가슴에 꽃아드리
기 위해 꽃 한 송이 를 샀습니다. 그
그날 저녁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시면서 이런 얘기르 했습니다.
사법시험 합격은 우선 장기간을 버틸 수 있는 체력, 수험기간 동안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재력, 꾸
준히 닦은 학과실력, 시험을 얼마 앞두고 극도의 불안과 초조, 긴장 속에서 이를 극복하고 자기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 절대자에 대한 신앙이나 정신력 등등이 합쳐져 이루어지는 하나의 작품
같다고...
 
어머님의 눈물
 
 시험이 끝나던 날 밤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불합격이 된 꿈을 꾸고 불안과 초조 속에서도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발표 하루 전이었습니다.
미리 연락주겠다던 친구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역시 떨어졌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동안 나름대로 마음의 정리르 해오던 터라 조금쯤은 담담했습니다.
6월의 중순이었지만 제겐 연말의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짓고 새해를 맞이하듯 이제까지 있었던 나의 지난 날을 결산하고 어떤 직장이든
취직해서 새생활을 시작하는 것으로...
 
 저는 취직하기로 마음먹고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를 신청하였습니다.
발표가 있을 그 날 아침 어머님께 합격하지 못했음을 알려드렸습니다.
  
 "내 정성이 부족한 모양이구나, 남들은 절에 공들도 드리고 한다든데 그짓 한번 못했으니..." 

 그 순간에도 어머님은 못난 자식을 탓하시기 보다는 당신의 정성 부족을 후회하셨습니다.
그 눈가에 물기가 감돌자 말 끝을 흐리셨습니다.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집을 나왔습니다. 교외선을 탈까 생각하다가 졸업증명서 등을 찾으
러 학교에 갔습니다.
잠깐 들른 법경대 조교실에서 "2차시험 사정위원으로 들어가셨다가 나오시는 교수님으로부터 연
락을 받았습니다.
합격! 합격을 했답니다."하였습니다.

 시험은 학생이 보지만 체점은 교수님이 하신다든가. 나중에 알아보니 과락을 걱정했던 과목이
오히려 평균점수를 넘었습니다.
역시 중도 포기는 금물인 모양입니다.
믿어지지가 않아서 총무처와 고시연구사로 확인 전화를 하고 나서야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어머님, 감사합니다." 어머님과 저는 부둥켜 안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네가 내 한을 풀어주었구나.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처음이었습니다. 어머님의 눈물은...
 

새로운 출발점에 서서
 

  축전과 전화도 뜸해진 지금 조용히 지난날들을 반추해 보며 내일을 생각해봅니다.
뭔가 제가 원하던 것을 이루었다는 성취감을 맛보았다는 이외에 특별히 합격했다는 실감이 나지
는 않습니다.
시험을 준비할 때는 합격 이외에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나 막상 합격이 되고 장차
 
법조인이 된다 생각하니 막중한 임무에 두려움이 앞섭니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소신 있고 정(情)이 있는 판결을 할 수 있을까.
남보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좀 더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겠다는 나의 마음에 위선
은 없는가.
얄팍한 동정심 따위는 아닐까.
그동안 이 사회와 여러분께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는 도움을 만에 하나라도 환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제게 지금 필요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라는 것을 압니다.
제겐 지금부터 참 용기와 슬기가 필요하며 그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항상 시작하는 마음으
로 저를 성원하여 주셨고 앞으로도 성원하여 주실 여러분들의 기대에 보답할 것을 다짐합니다.
 
  끝으로 저의 이런 이야기들이 보는 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비칠 것으로 보나 저에게는 남다른
특이한 성격이나 환경이 주어진 것이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흔히 겪을 수 있는 과
정이며,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 걷겠다고 저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 내가 태어난 고향, 조국 등은 선택할 수 없어도 그 밖에 많은 것들은 자신의
마음 여하에 따라 선택할 수 있으며, 항상 자기에게 주어진 여건과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를 최선
을 다할 때 어떠한 형태로든 보답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사실 저는 보시다시피 저의 의지나 노력보다는 주위환경의 변화나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오늘
이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감사를 드려야 할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모교의 총장님을 비롯한 교수님, 교직원선생님들께 감사드리고, 항상 친가족처럼 대해 주시며
격려를 주셨던 박길준 교수님, 김욱곤 교수님, 임종율 교수님, 양 건 교수님과 법학과 교수님들,
 
민소법의 강현중 판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려울 적마다 학비를 보태주신 조명준 선생님, 로타리문화장학재단 이병창 사장님, 제가 중고
등학교 과정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검정고시 과정의 고려학원 문상주 원장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드리고 특히 마음으로부터 정성을 모아 기념패와 기념선물을 마련 전달하여 주
었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밝은 내일을 설계하며 검정고시 과정을 공부하는 고려학
원 학생들께 감사의 마음과 함께 그 정성 길이길이 마음속에 새길 것을 다짐합니다.
 
 또한 저를 알게 모르게 성원해주신 여러분과 항상 격려를 아끼지 않고 어려운 일을 해주었던 모
교의 법학과, 검정고시동문회, 법률연구원, 행정연구실 실원들과 친우들께 감사하며 지금 이 순
간에도 이 길을 가시는 여러분들의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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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탠스
배움블로그2013. 8. 20.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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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다해도 이길을..'중 박영립 변호사님 사법고시 합격수기입니다.
 
 
글머리에
 
 진정 이 사회와 모든 분들께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펜을 듭니다.그러나 막상 펜을 들고 보니
저의  수험기간 동안 커다란 힘이 되고 길잡이가 되어 주었던 선배님들의 합격기에 혹은 누가 되
지 않을까,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역겨움이나 분노를 자아내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또한 이제 그
만  묻어두고 싶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지난날들, 그러나 오늘의 저를 있게 해준 소중한 날들
을 반추하려 하니 만감이 교차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저의 그 동안의 평범한 생활 속에서 얻
은 경험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데 부족한 문장 실력으로 개념화하고 문장화하려 하
니 어색한 마음이 앞섭니다. 

운이 좋았고 이 사회와 수 많은 분들께 물심양면의 많은 도움으로 조그만 결실을 맺었다 하여 합
격기를 쓴다는 것이 어쩐지 건방진 생각 같고 정말 어려운 처지에서 공부하시는 많은 불들께 송
구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읽으면서 우리의 지난 날을 잠깐 뒤돌아보고 반성과 분발의 계기로 삼아 
밝아오는 내일을 준비하고 설계하고 싶은 충동에서 감히 펜을 들게 외었으니 넓은 이해와 관용
빌겠습니다.
 
 
서울의 하늘 밑
 
 전남 담양의 조그만 산골 동네에서 태어나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은 했으나 진학을 포기하고
광주에 있는 조그만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객지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 떄 사무실 책상 위에서
잠을 자던 처음 며칠 밤은 바닥으로 떨어졌으나 곧 습관이 되어 잠버릇하지 않고 곱게 자는 습성
이 길러졌습니다.
그 해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이듬 해에 대바구니장수 아주머니들을 따라 무작정 상경했습니
다.
 
밤 새워 달려온 완행열차에서 내린 새벽의 노량진역은 하얗게 서리가 내려 잇었고, 2월 말의 찬
바람이 겁먹은 15살 촌놈을 더욱 춥게 만들었습니다.
그 길로 앞 뒤도 없는 전차에 몸을 싣고 청량리에서 일하고 잇는 친척을 찾아 갔습니다. 
 "당장 오늘 저녁차로 내려 가거라, 서울이 어떤 덴데..." 

친척의 첫 마디였습니다. 무언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막연하나마 화려한 설계도 해보앗고 금의
환향도 꿈꾸어 보았던 서울이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서울이었고 친척 역시 시골 소문과는
달랐습니다.
 "죽어도 못 내려 갑니다. 죽어도..."

 무슨 일이 어찌되던 내려갈 수만은 없었습니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겨우 겨우 올라온 서울인데, 내려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
다.
그리하여 간신히 얻게 된 일자리는 서울역 보근의 여관이 었습니다.
얼마 후에야 그 곳이 숭남동이라기 보다는 [양동]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었고 여관이란 곳이 
나그네들의 숙소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둠의 자식들]의 [카수 영애]등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럭저럭 3개월이 지났을 무렵 시골에서 수학여행 온 중학생 단체손님을 받았습니다.
여관 측에서는 학생들의 점심을 배달해 주기로 하고 그들은 창경원을 구경하러 떠났습니다.
얼마 후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저는 무척이나 전화라는 것을 받아보고 싶던 터라, 때는 이 때다 싶어 뛰어가 받았습니다.

 "열 두시까지 [근천문] 앞으로 점심을 배달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분명 그렇게 들은 것 같았는 데 몇 통의 전화가 다시 오고, 두시가 훨씬 넘어서 점심이 배달
된 후에야 저는 비로소 약속 장소가 [근천문]이 아니고 [근정전]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좌우간 그 일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여관 주인과 수학여행 인솔자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고, 앞
으로 또 꾸중들을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 놈의 [근정전]인 가가 도대체 어디에 붙어 있는 무엇이길래...
런닝셔츠와 슬리퍼 차림으로 여관을 아무 말도 없이 뛰쳐 나왔습니다.
어린 저의 판단으로는 그것이 최선인 듯 싶었습니다.
여관에서는 월급이 없었기 때문에 제가 손에 든 것이라고는 손님들이 준 5월, 10월의 팁을 틈틈
이 넣어 둔 진흙 저금통 뿐이었습니다.
우선 급한 김에 나오긴 했으나 그 꼴로는 아무데도 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 저금통을 깼습니다.
600원 정도 들어 있었습니다.
남대문 시장에 들러 남방셔츠와 운동화를 산 후 또 한번 청량리행 전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번 찾아갔을 때 내려가라던  일이 생각나 그대로 돌아서서 노량진 대바구니장수 아
주머니들께로 향하였습니다.
그 곳에도 저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미 다른 곳으로 장사를 떠나버린 후였습니다.

 이제는 갈 곳도 없었습니다.
이 넓은 서울 방에서 철저하게 혼자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거리에는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습니
다.
저의 발걸음은 서울역 앞 지금의 [대우빌딩] [남대문교회] 등이 자리잡고 있는 잔디밭 위에 멈췄
습니다.
어머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고향생각이 났습니다.
그 곳에서는 잠깐이나마  내가 몸담고 있던 여관이 빤히 바라다 보였습니다.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고 들어갈까 하는 생각도 해봤으나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6월이었지만 밤이슬 때문에 잘 수가 없어 신문을 주워서 깔고 덮고 잤습니다.
자다가 추워서 움직임녀 나을 것 같아 돌아 다니다가 파출소 순경아저씨에게 야단을 맞고 골목
으로 들어가 음식점에서 내다버린 온기가 있는 연탄재를 안고 그 밤을 지새웠습니다.

 다음 날은 일자리를 구한답시고 남대문시장, 서울역 부근 일대를 두리번거려 보았으나 헛수고였
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발 밑에 굴러다니는 신문쪼가리가 보였습니다. 무심코 던진 시선은 [직업소
개]라는 네글자에 박혔습니다.
저는 신문을 집어들고 쏟아지는 비도 아랑곳 없이 공중전화를 찾아 신문광고란에 난 직업소개소
에 전화를 했습니다.
서울은 참으로 자비로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제게 서울의 [직업소개소]라는 곳은 자고 먹을 수 있는 일자리를 소개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전 남산 위에 올라가서 서울시내를 바라볼 때는 셀 수도 없이 엄청난 건물과 사람들 중에 나
하나 잘 곳, 아는 사람 하나 없는가 하고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는데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
다.
 그 날 저녁은 무작정 찾아든 분식센타에서 대충 지내고 아침 일찍 전화로 가르쳐 준 곳으로 묻
고 물어 찾아 갔습니다.
세운상가 부근에 있는 직업소개소에서는 소개비 천원을 요구하였으나 제게는 100원 정도 밖에
없어 월급타서 갚겠다고 눈물로 하소연하여 종로 3가 단성사 부근의 음식점에 일자리를 얻었습
니다.
나중에 이 곳도 [종삼]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일자리를 구해 준 직업소개소
에 고맙다는  인사도 여러차례 했고 그들도 제가 있는 곳으로 잊지 않고 음식을 주문해 주었습니
다.
거리는 약간  멀었으나 정성껏 배달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돈은 항상 주지 않고 주인에게 가서 얘기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월급날에 가서야 직업소개비 외상 900원보다 조금 많던 저의 월급에서 그들이 먹던 밥값이 충당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럭저럭 3개월 정도 흘렀을 무렵, 우연히 고향의 국민학교 동창을 만났습니다.
양복점에 다니던 친구가 동대문 시장에 심부름으로 전차를 타고 가다가 길을 건너던 저를 알아보
고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달려왔던 것입니다.
기술을 배우고 있다는 그 친구 얘기를 듣고는 일자리를 부탁했습니다.
잘 곳도 먹을 것도 없을 때는 가릴 것이 있을 수 없었으나 저도 이제는 서울에 와서 어언 반년이
지나고 보니 막연하나마 앞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 후에 그 친구와 같은 양복점에 있게 되었고 그 때까지 여관에서나 음식점에서 항상 [꼬마]
로만 불리던 저는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양목점에서 보낸 그 해 겨울은 제게는 유난히도 추웠습니다.
양복점 공장 한 켠에 자리를 마련하고 누우면 춥고 배가 고팠습니다.
양복점에서 받은 돈으로는 쌀을 사고 소금과 막간장을 조금 사고 나면 없었습니다.
이 때부터 거의 매일같이 1년이나 계속된 감기가 축농증으로 되어서 지금도 코가 완전하지가 못
한 형편입니다.
이 당시에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을 월급 무렵에나 간혹 먹는 콩나물국과 어쩌다 얻어 먹어 보는
[샘표간장]이 었습니다.
빈병을 가지고 가서 조금씩 사먹는 막간앙에 비하면 [샘표간장]은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습
니다. 

 그러나 그 곳은 기술 정도에 따라 월급이 달랐으므로 내일을 생각할 수 있었고 가능성이 있었습
니다.
기술자 선생님들은 자신들을 거둘 수 있을 정도의 기술은 강요하다 시피 가르치나 그 이상은 잘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다 가고 없는 밤을 꼬박 새워 조금씩 보고 들은 것을 익히면서
소위 말하는 [기술자 곤조](?)가 어떠한 것인가를 차츰 깨달을 무렵 바지를 간신히 만들 수 있었
습니다.
양복점에 들어온지 약 6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습니다. 

 이제는 양복점 공장 자취생활에도 이골이 나 있었고 월급도 저축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차츰 안정이 되면서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과 동생들, 우리 식구가 서울의 한 구석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당시 17살이던 저는 9급(당시 5급)공무원 월급 수준의 거의 두배에 가까운 수입을 올린 적도 많
았습니다.
양복점 주인은 기능올림픽에 나갈 준비를 위해 윗저고리 등의 기술을 배우도록 권유했으나 기술
배우는 동안 다시 수입이 줄어들므로 망설이고 있을 때 기성복이라는 거센 유행의 물결이 밀어닥
치고 있었습니니다.
 또한 양복점 기술자는 하루 일의 양에 따라 수입이 정해지므로 나이가 들수록 수입이 오르지 않
고 오히려 줄어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교복 입은 아이들에 대한 부러움이, 사회와 부모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점점 커가고 있었
습니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양복점을 그만 두어 버렸습니다.
막연한 계획은 막연한 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인지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할 곳을 찾아 보았으나
헛수고로 끝나버렸습니다.
 이리하여 정해진 일자리 없이 약 반년 동안을 노동판, 버스승객 계수원, 가축병원, 전선회사 임
시직공,신문보급소 등을 닥치는대로 전전하였습니다.
가축병원에 있을 때는 애완용 개들이 웬만한 사람들보다 훨씬 고급으로 먹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제는 공부고 뭐고 양복점 외에 일정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구로동 부근의 공장지대 일대를 하루에도 몇 바퀴씩 돌며 기웃거렸으나 어쩌다가 모집공고
가 있으면 자격은 대부분이 중졸, 고졸 이상이었습니다.
거짓으로 이력서를 꾸며 제출하기도 해보았으나 막상 졸업증명서를 요구하는 데는 포기하지 않
을 수 없었습니다.
제게는 이 사회가 중요시하는 것은 졸업장이지 결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으며 실업자가 어떠
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되었습니다.

 이러던 중에 어머님께서 일을 거들어 주시던 댁에서 이불 솜을 파는 동대문시장 점원 자리르 소
개해 주었습니다.
이름과 나이, 고향 등을 묻고 학력을 물었습니다.
중학교 중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더하고 나서 신원보증서와 주민등록등본을 갖추어 냉리 아침 9시까지 나오라
고 했습니다. 
그런 절차없이 떠돌아 다녔던 저는 [신원보증서]란 대서소에 가서 양식을 사다가 간단하게 적어
내는 것인 줄만 알고 이제는 취직이 되나 싶어 그 길로 대서소에 물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제 주위엔 재산세 얼마를 내면서 저의 신원을 보증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쉽게 풀리나 했더니 역시...
다음 날  저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돌아서려니 앞이 막막하고 공연한 분노가 일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러한 업종에서는 하루에 금전을 꽤 다루기 때문에 보통 필요한 서류인 데
도 그것을 모르는 저는 [아저씨, 저의 고향이 ()()()이기에 신원보증서가 필요한 겁니까? 그렇다
면 어린 저의 마음에 커다란 못이 되겠습니다. 죄송합니다.]하고 맥없이 돌아설 때였습니다.

 "어이, 여보게" 뒤돌아 보니 주인 아저씨께서 손짓을 하셨습니다.
 "잘 할 수 있겠나?"
 "네, 장담은 못하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날로 점원이 되었습니다. 그 곳 생활을 익히면서 성실과 신용이 살아가는데 가장 큰 자본이
며, 똑같은 크기의 같은 업종인 점포에서도 세금 등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보고 무엇을 알아야
만이 자기의 정당한 이익을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사람들은 공동생활을 하면서 서로르 오랫동안 사귀어 평가하기도 하나 대부분은 각자가 가진 외
형적인 어떤 기준으로 먼저 선입견을 가진 후에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동안 국민학교 졸업 학력으로 얼마나 많은 벽에 부딪혀 왔던가...
저도 남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누구에게 경리학원 얘길 듣고 어떻게 할 줄 졸라 하던 차에 [검정고시학워]광고를 보았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교복
 
 "해낼수 있을까"하는 의구심도 있었으나 지금 아니면 영영 할 수가 없을것 같았습니다.
얼마를 생각하던 끝에 어머님께 말씀드렸습니다. 
 "9개월이면 됩니다. 제게 9개월만 주십시오. 중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하늘이라도 훨훨 날을 것 같습니 다."
 
주인 아저씨께도 말씀을 드렸더니 너무나 고맙게도 오전시간을 할애해 주셨습니다. 
제 나이 스무살, 국민학교를 졸업한지 8년, 국민학교 동창들이 대학교 2학년, 지금은 군에 가 있
는 남동생이 중학교 2학년 때인 72년 9월 6일, 종로 2가 부근에 있는 중학교 과정 검정고시 학원
에 나갔습니다.
겸연쩍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여 맨 뒷 좌석에 앉았는데 첫 시간이 수학시간으로 방정식을 푼다
고 했습니다.
 
활자체 대문자도 익숙치 못한데 꼬부랑 글씨 x, y가 어렵고, 좌변에서 우변으로 넘으면 부호
가 어쩌고 하는데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려도 알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과목도 비슷하게 보내고 학원 문을 나섰습니다.
눈 앞이 캄캄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 알아보니 내가 다니는 반은 이미 3개월 전에 개강한 반인데 학생수가 적어 자주 합반
하다 보니 진도가 꽤 나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수학이 가장 문제였기에 그 날 배운 걸 모두 외어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모르는 것은 동생에게도 물어보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은 대학 다니는 국민학교 동창 친구가 왔길래 모르는 것을 밤 새도록 물어 보았습니
다.
바로 옆에서 그것을 듣고 계시던 어머님은 그 날 저녁 한잠도 못 주무시고 국민학교 다닐 때는 성
적이 남에게 별로 떨어지지 않았는데 못난 부모 때문에 저렇게 엄청난 차이가 나다니 하시면서
우셨다고 제가 합격한 후에 말씀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오전 중에 학원에 나갔다가 뛰다시피 하여 가게로 돌아오면 오후 2시경이 되었습니다.
가게 인근의 시장 상인들은 제가 가게에 가면 "아, 지금 2시군" 할 정도였습니다.
검정고시학원 광고에는 9개월 속성 과정이라고 했으나 몇 개월이 되었던 국가에서 시행하는 검
정고시 시험에 합격해야만 자격이 인정되었습니다.
73년 7월 말경에 시험이 있었습니다.
불안했습니다. 초조했습니다. 될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이 책만 붙들고 있었습니다.
식사할 때도, 화장실에 갈 떄도, 버스 속에서도, 길에 다니면서도...
사법시험 준비를 할 떄도 이 때 만큼 열심히 하지는 못했습니다.
 
 시험을 얼마 앞두고는 어머님과 여동생에게 모든 살림을 떠맡기고 그 가게를 그만 두었습니다.
이미 양복기술자가 된 여동생은 못난 오라버니를 수없이 원망했으리라.
이런 상황이었기에 제게 남은 길이라곤 합격 이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최고 득점으로 합격했습니다.
합격만 하면 뭔가 될 줄 알았는데 넘어야 할 산들은 더욱 많았습니다.
최고득점 덕분에 수업료가 면제되어 고등학교과정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74년 8월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도 무난히 합격은 했습니다.
다음 해 K대학교 상대에 입학원서를 냈습니다.
그 때 형편으로는 대학 다닌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기에 꼭 합격해야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해온 공부가 과연 정규 중, 고등학교에서 배운 것과 같은 것인지 궁금했고, 제 실
력이 어느 정도일지 비교해 보고 싶었습니다.
 
 역시 실력은 떨어져 불합격이었습니다.
다닐 형편은 못되었다 할지라도 불합격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데 후기에 응시하라는 간곡한 격려와 함께 각 대학교를 소개하는 진학관계 잡
지를 같이 공부했던 여학생이 보내 주었습니다.
그 때 진학관계 잡지르 처음 본 저는 대학이 그렇게 많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집에서 도보로 통학이 가능한, 지금은 모교가 된 [숭전대학교]에 원서를 냈습니다.
신의 뜻이었을까. 저는 법경대 수식으로 합격한 덕분에 꿈에 꿈 속에서도 그리기 어려운 대학생
이 되었습니다. 
 대학생! 몇년 늦긴 했으나 얼마나 가슴 부푼 단어인가. 그렇게도 입어보고 싶던 교복을 맞춰 입
으며 저에게 주어진 정규 학창생활을 알차게 보내리라 몇 번이고 다짐했습니다.
학교 측과 교수님들의 배려로 매학기 장학금을 받을 수는 있었으나 등록을 할 때마다 이번 학기
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대학생활을 지탱하기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저학년 시절에는  가정교사, 그룹지도, 월부서적되판 등을 해보았으나 신통치 않아 공부에만 전
념하기로 하였습니다.

 어머님께서는 그 일대의 삯빨래 등을 도맡아 하셨고, 용산시장, 노량진 수산시장, 잘품팔이, 새
마을 취로사업 등을 계속하셨습니다.
어머님과 자식과의 관계는 그래야 하는가?
어머님께서는 저를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치셨습니다.
저는 그 분께 어떻게 해드려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어려우신 생활 속에서도 성실하고 진지하게 삶을 사시는 그 분께 고개가 수그러질 뿐입니
다.
 
 또한 지금은 결혼하여 한아이의 어머니가 된 여동생, 한창 멋부릴 나이에 마음에 드는 좋은 옷
한벌 제대로 못 사입고 우유부단 하고 강단없는 오라버니 대신 가족의 생계와 학비를 담당했었습
니다.
제가 대학 3학견 때 동생이 결혼하던 날, 친구와 술 한잔하고 무기력한 저 자신이 원망스러워 눈
물을 흘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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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