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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8.06 지리산(智異山) 피아골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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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智異山) 피아골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통꼭봉과 촛대봉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과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경계
- 「피아골 - 피」, 되풀이 된 피아간(彼我間) 피 흘림의 역사


○ 영화 「피아골」은 빨치산 전투기록대로 현지 촬영한 영화

지리산 어느 골짜기인들 사연 없는 이름이 있을 것이며, 전설을 지니지 않은 곳이 있으랴마는, 그 중에서도 피아골은 역사의 상처, 지리산의 수난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곳으로서 특히 기억되어야 할 이름이다.

피아골은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의 지리산 골짜기이다. 지리산의 서쪽 최고봉이 되는 반야봉(般若峰 : 1,732m)과 삼도봉(三道峰 : 1,550m) 노고단(老姑壇 : 1,507m) 사이의 깊은 계곡이자 유명한 연곡사(燕谷寺)가 있는 곳이다. 연곡사(燕谷寺)가 있는 곳이니 그 이름대로 「연곡」은 우리말의 ‘
제비골‘쯤 되는 이름인데 그 유래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1955년도에 만들어진 영화 「피아골」에서 비롯되었다. 이 영화는 1954년 8월 빨치산 토벌작전에 참여한 국군의 전투기록과 수기를 바탕으로 지리산 현지 촬영에 의하여 만들어진 영화로서, 반공영화작품이면서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사상적 갈등과 인간성의 문제, 인간의 모순과 본능을 파헤친 문제작으로 회자되었던 영화이다.

눈 쌓인 산을 보면 /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을 보면 /
노여움이 불붙는다. / 저 대 밑에 / 저 산 밑에 / 지금도
흐를 붉은 피 // 지금도 저 벌판 / 저 산맥 굽이 굽이 /
가득히 흘러 / 울부짖는 것이여 / 깃발이여 / 타는 눈동자
떠나던 흰옷들의 그 눈부심

시인 김지하씨의 「지리산」이다. 역사의 칼날에 의하여 죽고 죽이는 피 흘림이 되풀이 된 곳. 그곳이 바로 지리산이며, 피아골이다.

1948년 10월 여수. 순천 무장군인 봉기사건과 1951년 6.25사변의 패잔병들이 소위 남부군 사령부 지휘 아래 빨치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지면서, 지리산 일대에서 준동하였다.
이들에 대한 토벌작전으로 1955년 말까지 군. 경과 죄 없는 민간인 사망자, 그리고 빨치산 사망자 등 1만 여명 이상이 지리산 기슭에서 죽어갔고, 그 중에서도 전투가 심한 피아골 지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갔다. 이데올로기는 무엇이며, 민중해방과 계급투쟁은 또 누구를 위함이었던가.

○ 지리산 빨치산 토벌과 구한말의 의병항쟁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겹겹이 봉우리 쌓인 연곡사 골짜기에
이름 없는 이들이 나라 위해 죽었도다.
말들은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있고,
까마귀 떼만 나무숲 사이로 날아 앉는다.…(중략)
홀로 서쪽 바라보면서 뜨거운 눈물 흘리는데
새 무덤 오똑한 곳에 들국화만 피었어라.(원문 생략)

이것은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쓴 <연곡싸움에서 순절한 의병장 고광순을 기리며>라는 시이다. 을사조약후 일본의 토벌을 외치며 의병봉기가 시작되었으나, 특히 1907년 우리 군대 해산 후에는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전라도 지역은 일제에 대한 의병전쟁이 가장 활발한 지역이었으며, 그중 김동신, 고광순 등의 의병장이 이끄는 부대의 지리산 지역 전투였다.

지리산 전투는 피아골의 연곡사, 섬진강, 화개장터 등지에서 벌어졌으며, 이 싸움으로 인하여 연곡사가 불타고, 이때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이 연곡사 싸움소식을 듣고 황매천은 연곡사로 달려갔다가 그 참상을 보고 돌아와 이 시를 쓴 것이다.

피아골에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외세가 제 백성을 도륙하면서 이 강토를 유린하고 있을 때 이 나라 조정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
그때 우리 의병과 일본군이 치열하게 싸웠던 싸움터인 화개장터 옆 옛 섬진강 나루터에 지금은 영.호남 화합과 우의를 다지는 남도대교(南道大橋: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의 두 남도를 연결하는 다리라는 뜻)가 2003년 4월 경 개통되어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다시 피아골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연곡사의 의병전투에 앞서서 지리산 일대는 이미 동학 농민전쟁의 격전지가 되었던 곳이다.

접주야 접주야 임접주야. 그 많은 군졸을 어디다 두고
구리실 막바지에 낮잠 자느냐.

이 노래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구례의 농민군을 이끌었던 임정연이 일본군에 붙잡혀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 구리실 골짜기에서 처형되었으므로 이 지방 농민들이 부른 노래라고 한다.

녹두장군 전봉준에 의하여 전라북도 고부에서 불붙은 농민전쟁은 지리산의 화엄사와 구례, 남원 일대, 영남지역의 산청, 진주, 하동 일대에서도 일본군과 접전이 벌어졌으며, 산청군 단성에 집결한 농민군이 한 때는 5천명에 이르기도 하였던 것이다. 지리산 일대에서 농민군 함성이 메아리칠 때 피아골인들 조용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 동학농민전쟁과 정유재란의 비극

피아골에서 일어난 역사의 비극은 다시 1597년 정유재란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피아골 입구의 바로 옆에 사적 제 106호로 지정된 석주관이 있다. 이곳은 원래 고려말부터 흙과 돌로 성을 쌓고 섬진강을 따라 침입하는 왜구를 막던 곳이다.

정유재란 당시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오르던 왜적을 막다가 구례의 선비들과 마을 주민들이 죽자, 이번에는 연곡사와 화엄사의 승려 150여명, 그리고 수많은 의병들이 가세하여 석주관 방어에 나섰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순절하고 말았다. 지금 남아있는 석주관 칠의사 묘와 순절비가 바로 그것을 기리는 비이다.

나라 위해 모집에 응하고 / 주인 위해 내 몸을 잊었네 /
중이라고 어찌 가리랴 / 기꺼이 나라 위해 일어섰도다 /
핏물이 내를 이룸을 한 조각 돌에 사연을 새기니 /
그 절개, 그 충정 영원하리라.

이것은 칠의사(七義祠) 순절비문의 일부이다.
석주관(石柱關) ! 돌기둥으로 세운 관문이라는 뜻이다. 그 돌기둥이 지금 섬진강 가의 어디쯤이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때 나라의 부름이 없었음에도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서 이 섬진강 벼랑에서 초개같이 한 목숨을 던진 그분들이야말로, 붕당을 짓고 공리공론으로 날을 지새우던 썩어빠진 조정 신하들보다도 분명 이 나라를 지키는 돌기둥(石柱)이 되었음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피아골! 이곳은 본래 직전(稷田), 즉 피밭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피는 화본과(禾本科)에 속한 일년생 풀로서 이곳에 있었던 피밭골에 의하여 피밭골>피앗골>피아골로 된 것이다. 그런데 이 ‘피’기 피 = 혈(血)로 풀이되면서 외세의 침략과 민중의 저항, 민족분단과 동족간의 갈등으로 이어지는 살륙과 전쟁의 역사, 그 역사의 질곡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피아골 연곡사 뒤쪽에는 높이 904.7m의 통꼭봉이 있다. 이 봉우리를 현지에서는 ‘통꼭지’라고 부르는데, 모든 지도에는 ‘통꼭봉’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 통꼭봉이 나에게는 통곡봉(痛哭峰)으로 들렸다. 수많은 젊은 죽음을 애도하여 통곡하는 봉우리인 「통곡봉」으로 들리는 것이다. 또 그 남쪽의 촛대봉은 그 죽음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촛불을 켜놓는, 그 「촛대봉」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 있다. 피아골의 ‘피아’가 적과 아군을 싸잡아서 말하는 「피아(彼我)」로 풀이되면서, 같은 동족의 젊은이들이 적(彼)과 아군(我)으로 나누어져 싸운 「피아골」로서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피아골 단풍이다.

피아골 단풍은 예로부터 지리산 단풍의 대명사로 알려진 곳이며, 그 중에서도 삼홍소(三紅沼)는 산홍(山紅), 수홍(水紅), 인홍(人紅)이라 하여 삼홍소로 불러지는 곳이다.

가을에 붉은 단풍 봄꽃보다 고와라.
천공(天公)이 나를 위해 뫼빛을 꾸몄으니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마저 붉어라.
-조식(曺植) <삼홍소>

피아골에서 피 흘린 역사를 증언하기 위하여 피아골 단풍은 저리도 붉게 물드는 것인가. 아니면, 그 피를 먹고 자란 나무들이기에 그 단풍마저 핏빛을 띠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피아골의 종녀촌(種女村) 이야기를 그냥 넘길 수 없다.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사라진지 오래된 이름이지만, 피아골 어느 골짜기인가 종녀촌이라는 여인들만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종녀촌은 글자 그대로 씨받이 여인을 말한다.

자식을 원하는 지방의 부자들이 벼 10가마니 정도를 주고 여인을 사면 팔려간 여인은 자식을 낳아주게 되는데, 아들을 낳아주고 종녀촌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딸을 낳으면 그 딸은 이곳으로 데려와 살면서 대를 물려가며 종녀가 되었다고 한다.

이 종녀촌은 처음에는 타 지역에서 중매자의 꾐에 빠진 시골 처녀들이 들어와 살았으며, 나중에는 종녀들이 낳아서 데리고 들어 온 딸에 의하여 종녀촌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종녀촌의 여인들은 자식을 낳아주는 것을 생업으로 하면서 이곳에서 일생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필자는 단풍이 물들어 가는 2003년 10월 말경 종녀촌을 찾아서 피아골계곡으로 들어갔다. 섬진강변 입구에서부터 연곡사를 지나 피아골 여러 마을을 들러보았지만 시원스럽게 종녀촌에 대하여 입을 열어주는 촌로들을 만나볼 수 없었다. 아마도 아픈 기억을 외부에 드러내놓기 싫은 탓일 것이다.

피아골 긴 골짜기마다 서리고 맺혀 있는 수많은 사연들을 여기에 다 적을 수 없다. 피아골은 우리 민족의 한과 원, 그리고 서민의 애환과 눈물을 담고있는 골짜기이며, 종녀촌 이야기는 또 다른 측면에서 피아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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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