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4.06.09 <이장원의 국제금융전망대> 불평등의 세계화
  2. 2013.10.21 164 나는 평등주의가 싫다.
배움블로그2014. 6. 9.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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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인포맥스) 우리나라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양극화와 청년실업, 고령화, 극심한 내수침체로 요약할 수 있다. 수출호조로 국가 경제 지표는 무리가 없지만 정작 국민의 생활경제는 침체의 그늘에 빠진 것이다. 나라 곳간은 넉넉한데 왜 내수는 살아나지 않을까. 이 문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빈부가 극명하게 나누어진 상황에서 경제주체인 가계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소비를 희생한다. 100세 시대로 대표되는 고령화도 소비 침체를 자극한다. 은퇴를 위한 노후자금 마련을 위해 각종 연금과 보험에 돈을 묶어두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골드만삭스가 낸 보고서는 주목할 만하다. 고령화 때문에 한국의 소비가 침체에 빠지고, 이것이 바로 경상수지 흑자가 유지되는 이유라는 것이다.

기업들이 투자를 기피하는 것도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우리 기업들은 IMF 이후 언제든지 망할 수 있다는 교훈을 배웠다. 이러한 'IMF 트라우마' 때문에 대기업들은 곳간 풀기를 주저하고 있다. 현금만이 절대선이라는 원칙 아래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니 고용이 얼어붙고 많은 청년들이 실업 상태에 놓이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는 우리나라에서만의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과 일본, 유럽도 비슷한 실정이다. 중산층 붕괴와 양극화, 이로 인한 소득불균형 문제는 최근 미국에서 핫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올해 국정연설의 핵심은 소득불균형 문제였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고통받는 미국 중산층'이라는 기사에서 미국이 1분기에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한 것은 '한파' 때문이 아니라 중산층 감소로 인한 소비 동력의 약화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중산층이 무너진 게 미국의 경제활력을 떨어뜨렸다는 얘기다.

일본은 고령화와 젊은층의 고용 불안으로 인해 성장동력이 멈춰질 위기다. 기업들은 아베노믹스 덕택에 기사회생했으나, 정작 경제 선순환 고리를 이어줘야 할 임금 인상과 정규직 채용은 꺼리고 있다. 젊은층은 아르바이트, 단기계약직 등 비정규직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버텨나가고 있다. 미래가 없는 사회에서 경제활력을 기대하긴 어렵다.

유럽에서는 20%가 넘는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하다. 유로존의 25세 미만 청년실업률은 23.5%이고 이탈리아의 청년실업률은 무려 43.3%에 달한다. 양극화와 고령화, 청년실업 등 경제구조의 모순은 각종 경제 불평등을 양산하고, 이는 소비 침체를 유발해 내수를 좀먹는 요인이 된다.

국제노동기구(ILO)와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공동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30년간 빈부 격차가 지속되고 있다고 한다. 소득불균형과 경제불평등이 세계화됐다는 의미다. 소득불평등은 자연적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국가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나라별로 해법을 찾을 수 없다면 전 세계 정책당국이 연대할 필요도 있다.

거시적 측면에서 국가 경제가 회복돼도 미시적 측면에서 국민들이 힘들다면 성공한 경제라고 할 수 없다. 세계 경제의 컨트롤타워는 바로 이 지점부터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한다. 미국과 일본이 돈을 풀어 거시경제 지표를 살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경제의 온기가 바닥으로 퍼지지 않고 있다. 유럽도 돈을 푸는 형태로 경기부양을 준비하고 있으나 실물경제 회복에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다. 돈을 풀어 거시경제를 살리는 것은 한계에 도달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보다 차원높은 해법이 필요한 시기다.

(국제경제부장)

(서울=연합인포맥스)

jang73@yna.co.kr

(끝)

 

출처 : http://news.einfomax.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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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탠스
세이노 칼럼2013. 10. 21.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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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나는 평등주의가 싫다.

 

지난 번 대통령 선거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 마다 나는 딸들에게 "저건 완전 기만이다.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제도나 그 어떤 정치도 그런 나라는 만들지 못했다"라고 했다. "노동자와 농민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권영길 후보가 외칠 때는 "나는 저 양반이 당선되면 이민을 가겠다"고 가족과 친구들, 직원들에게 까지 말하곤 했다. 진심이다. 나는 노동자와 농민이 게으르건 아니건 간에 모두 평등하게 잘사는 나라는 끔찍하게 싫다. 나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만 잘 사는 나라가 좋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나타난 바베우프(Gracchus Babeuf)는 평민선언(Plebian Manifesto)을 내걸고 "모두가 생산한 것을 다같이 평등하게 똑같이 분배하자"고 외치면서 정부 전복을 기도하다 결국은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그가 내건 구호는 "태양은 모두에게 똑같이 비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당신도 그의 사회주의적 구호가 아주 마음에 들 것이다. 하지만 "태양은 모두에게 똑같이 비치지만 그 빛 아래에서 씨를 뿌리고 땀을 흘리지 않았으면서도 열매는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외친다면 강도나 거지이다.- 이건 내가 하는 말이다.

 

노력은 멀리한 채 즐길 것 다 즐기고 쓸 것 다 쓰며 살아온 사람들이 가장 즐겨 쓰는 말이 무엇인지 아는가? 인간은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과 부자들은 위화감 조성하지 말라는 것과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말들이다. 나는 내 딸들이 그런 남자를 만날까 봐 걱정이다.

 

1979년 마거릿 대처는 총리 취임사에서 “이제 사회주의와 인연을 끊자”고 하면서 자신의 적을 사회주의라고 단언하였다. 더불어 “기회의 평등은 보장돼야 하지만 결과의 평등을 필요 이상 추구하면 안 된다"고 강조하였고 "노력과 재능으로 성공한 사람이 이 사회를 견인하는 원동력이다. 그런 사람들이 소득이 높다는 이유로 그들을 악덕처럼 매도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녀의 주장에 물론 수많은 노조들이 “가진 자들을 편든다”는 이유로 물론 반대하였다. 어느 나라든지 가진 자들을 떫게 보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삶의 결과가 평등하여야 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능력에 따른 연봉제나 구조조정을 끔찍히도 반대한다. 그리고 그들 대다수는 당연히 일 못하는 사람들이거나 경쟁 없이 편안히 일하고 싶은 사람들, 혹은 일 이외의 다른 것들로 출세하려는 사람들이다. 노조는 노조 자체의 집단적 성격이 약해지기 때문에 언제나 결사 반대한다(질문: 노조 간부들 중에서 직장을 다니며 자기 몸값을 높이고자 외국어나 컴퓨터라도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 있거나 일에 있어서 장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있다면, 특히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의 간부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내게 소개 좀 하여 다오. )

 

나도 봉급생활을 해 본 적이 있다. 정말 열심히 하였지만 성이 유씨였던 부장이 한다는 말은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데 월급을 더 받는 것은 아니다"는 것이었고 그 말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6개월 만에 그 아부 잘하던 부장과 싸운 뒤 그만두었다. 열심히 하여도 대가가 늘어나지 않고 아부에 능하여야 한다면 도대체 그런 일을 내가 왜 하여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임금 시대에는 근로자의 최저 생활보장을 위해서라도 동일임금 제도가 필요하였지만 고임금시대인 지금은 당연히 생산성이 높은 사람에게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적게 지불하는 시스템이 될 수 밖에 없다. 평등이란 있을 수 없다. 당신이 만일 부자로 잘 살고 싶다면 이제 삶의 결과까지 평등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라. 당신이 부자가 되는 길은 연공서열이나 균등 임금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별 연봉제에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당신이 노력한다는 조건이 따른다.

 

나는 육신이 멀쩡한 노숙자들을 돕는 어떤 활동도 싫어한다. 일말의 동정심도 없다. 일거리가 없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돈 많이 받고 편안한 일자리가 없을 뿐이다. 3D 업종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가 수십만 명인 상황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휴머니즘 가득한 눈길로 그들을 이 경쟁 사회의 희생자라고 말한다. 정말 골 때린다. 절대 그들을 굶겨 죽여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도대체 돈 많이 받고 편안한 일만 찾는 놈들을 이 사회가 돌보아 주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태양과 달이 아무리 찬란하게 빛을 비추어도 엎어놓은 항아리 속을 밝게 하지는 못한다.?강태공이 한 말이다.

 

물론 경쟁에서 탈락한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는 관심과 정책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게으름이나 나태함으로 인하여 약자가 된 처지라면 그에 대한 징벌은 당연히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평등은 기회의 평등이 되어야 한다. 결과의 불평등을 인정하고 소득격차를 당연히 받아들이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것을 알아라.

 

(기회의 평등에 대한 말이 나올 때 나오는 반박 중 하나는, 부자집 자녀로 태어나 비싼 과외 받아가며 일류 대학도 들어가고 해외유학도 다녀와 출세한 경우와 가난한 집 자녀로 태어나 그런 혜택을 받지 못하여 사회 밑바닥에 있게 된 경우를 어떻게 기회의 평등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첫째 모든 부자집 자녀들이 일류대학을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과외를 아무리 시킨다고 해도 스스로 열심히 공부한 자녀들만 일류대학에 들어간다.

 

둘째 가난한 집 자녀들 모두가 일류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죽어라고 열심히 공부한 아이들은 과외를 받지 않아도 들어간다.

 

셋째 좋은 학벌도 없는 가난한 집 자녀가 학벌이 좋은 부자집 자녀와 똑 같은 방식으로 기회를 찾고자 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다. 어느 나라에서건 기득권 사회는 학벌로 그 문이 열리는 사회인데 왜 그 문 앞에서 서성거리냐는 말이다. 기회는 다른 곳에 있다. 그리고 그 다른 기회를 찾느냐 못 찾느냐의 문제는 순전히 자기 자신의 생각에 의해 결정되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문제이다.

 

이런 반박도 있다. 부자집 자녀는 사회에서 출발할 때 이미 부모의 경제적 사회적 보조를 받는다. 가난한 집 자녀는 그런 것이 없다. 이게 무슨 기회의 평등이란 말이냐. 내 대답: 맞다. 그러니까 자신의 분수를 알고 남들 놀 때 놀지 말고 남들 잘 때 자지 말고 노력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자신의 처지는 가난한 집 자녀인데 노는 것은 부자집 자녀처럼 놀려고 한다면 자신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결과의 평등을 신봉하는 것이다. 부자는 가난한 환경에서 더 많이 배출되어 왔다는 것도 알지 않는가.

 

한가지 당신이 모르는 사실을 알려주마. 재벌 가문이 아닌 이상 웬만한 부자집 재산은 그 부모가 나이가 들면 자녀들에게 재산이 쪼개지게 된다. 상속세나 증여세도 웬만큼은 내게 된다. 결국 자녀 1인당 재산 규모는 줄어들기 마련이지만 궁핍을 모르고 자랐기에 쉽게 돈을 쓴다. 그 결과 그 부자집 자녀들이 40대 초반이 되면 과반수 이상이 돈에 쪼들리는 생활을 한다. 당신 노력 여하에 따라 상황은 얼마든지 바뀌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내가 살아오면서 직접 목격하여 온 사실이다. )

 

sayno@korea.com , http://cafe.daum.net/saynolove 2004 6월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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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