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노 칼럼2013. 8. 25.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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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이런 일은 하지 말아라.

 

 

채플린 영화 중 1936년에 발표된 <모던 타임스> <독재자>와 더불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그의 마지막 무성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채플린이 그리는 현대는 냉혹하다.

 

 

 

지하도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와 공장으로 몰려 들어가는 노동자들은 이리저리 몰려 다니는 양떼들에 비유된다. 자본가는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그들을 감시한다. 최소시간 최대생산을 위해 노동자들은 숨쉴 틈이 없으며 화장실에서 담배라도 한 대 피우려고 하면 대형 스크린에서 자본가가 불호령을 내린다. 주인공 챨리는 작업대에서 컨베이어 벨트가 실어온 제품에 나사를 조이는 일을 한다. 그는 눈앞에서 벌이 날라 다녀도 기계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그의 손이 조금만 늦어도 전체작업이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쉴 새 없이 나사를 조이던 그의 두 손은 작업대를 떠나도 자동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여직원의 치마 뒷단추를 보고 쫓아가기도 하고 길가던 부인의 가슴에 있는 단추를 조이고자 하기도 한다.

 

 

 

자본가는 노동자들의 점심시간도 아까워 작업 중에 급식할 수 있는 자동급식기계를 설치한다. 채플린은 자동급식기계를 시험하는 대상으로 뽑히지만, 고장난 기계는 그를 거대한 기계의 흐름 속에 빠져 들어가게 만든다. 자동화로 인해 실직자가 대량 생산되고 굶주림 때문에 빵 하나를 훔치는 사람도 있고, 시위를 하다가 총에 맞는 사람도 생겨난다. 주인공은 트럭의 꼬리에서 떨어진 깃발을 들고 뛰다가 시위대열에서 앞장을 서기도 하며, 고아 소녀를 만나 가정을 꿈꾸고 다른 직업을 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은 소녀와 함께 지평선을 향해 떠난다.

 

 

 

이 영화에 대한 먹물들(교수,기자 등등)의 평가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적 모습과 전체주의의 획일적 통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통해 궁극적인 인간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 현대 사회에서 기계화, 표준화, 익명화된 노동자의 불행을 그린 가슴 아픈 영화, 대량생산 체제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거대한 기계의 한 부속품이 돼버린 인간의 모습을 희화적으로 보여 준 작품, 대중사회에서 소멸되어가는 인간성을 고발하고 물질문명이 가져오는 속도전쟁과 효율우선 주의에 대한 비판을 그린 영화.

 

 

 

이 영화를 20대에 우연히 보고 먹물들의 평가도 들었을 때 내가 가진 의문은 다음과 같았다.

 

맞다. 동의한다. 내가 태어나기 무려 20년 전의 영화이지만 여전히 미래의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살이 떨린다. 그렇지만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거냐? 그런 비평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는 너희들이야 먹물로 먹고 사니 그렇다 치더라도 나는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인간성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거냐? 주인공이 또 다른 세상을 찾아 떠나는 모습에서 그저 언젠가는 아름다운 세상이 오려니 하는 희망을 배우라고? 그렇게 말하기만 하면 장땡이냐? 내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태일’처럼 분신자살 하지 않고서도 사는 방법이 뭔지 좀 알려주면 안되겠냐?

 

 

 

나도 일류대학을 나오면 된다고? 전과목에서 귀신이 되는 것은 도대체 안되고 공부에 소질이 많지도 않은데 다른 방법은 없을까? 주인공 챨리가 허름하고 지저분한 옷일망정 모자와 구두까지 구색 맞춰 갖추어 입고 지팡이 까지 흔들며 양반걸음을 하듯이, 가난하여도 무슨 일을 하건 간에 인간적 자존심과 존엄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여야 한다고? 그게 해법이냐? 엿먹어라!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1908년 헨리 포드가 자동차 대량생산을 위해 설치한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게 되었다. 물론 노동자들의 삶이 열악해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자기 자신이 기계화되는 것에 회의를 느낀 노동자들이 공장을 떠나자 포드는 임금을 단번에 두배로 올리기도 했고 그 덕에 미국에서는 중산층 노동자 계층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부자가 되는 사람들은 컨베이어 벨트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후기 산업화시대를 지나 정보화시대로 이미 접어 들었다는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미국 메릴랜드대 교수이며 사회학자인 조지 리처는 그의 저서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에서 여전히 고속(高速)의 컨베이어 벨트가 우리 삶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컨베이어 벨트 밖으로 나가 살 수 있을까? 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당신이 노력을 아무리 해도 대가를 남들보다 더 크게 얻기는 어려운” 일들을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의 일들로 간주한다.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 있는 것과 유사한 일들은 구조적으로 육체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일들이지만 자격증이나 경험, 혹은 기술적인 지식이 필요하거나 두뇌를 써야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개중에는 컨베이어 근처에 머무는 일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부자가 되려면”무조건 한 우물을 파지 말고 우물을 잘 골라야 한다. (여기서 전제가 되는 것은 “작지만 안정된 수입을 계속적으로 확보하려면”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전제조건은 “만일 당신이 부자가 되고 싶다면” 이다. 이 점을 오해하지 말고 아래 글을 읽기 바란다.)

 

 

 

▶ 우선, 어떤 서비스의 질에 대한 기대치가 고객과 회사 간에 이미 설정되어 있는 경우 당신이 고객의 주문만 받는 일을 회사 안 혹은 밖에서 하거나 그 주문을 중간에서 시행하는 일만 하거나 그 고객으로부터 대금을 받기만 하는 일은 하지 말아라.

 

 

 

▶ 또한 어떤 일에 대한 대가가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의 나이나 경험과는 크게 상관이 없이 이미 사회적으로 계산되어 숫자로 확정되어 있는 일은 하지 말아라. 이런 분야의 일들 중에는 자격증이 필요한 경우도 많은데 세월이 지나가도 고객의 수가 점점 늘어난다는 보장이 전혀 없는 자격증들도 상당히 많음을 염두에 두어라.

 

 

 

▶ 당신이 받는 대가가 고객의 수와 관련 없이 정하여 있다면, 또는 자신의 노력 여하 보다는 근무 연한에 의하여 결정된다면 그 곳을 빨리 뛰쳐 나와야 할 것이다. 일한 대가가 노동시간의 양과 비례하기만 하는 일 중에는 금으로 만든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 있는 일도 있기는 하지만 부자가 되어 경제적 육체적 자유를 얻을 수 있는 효율적인 일은 결코 아니다.

 

▶ 조직 내에서 기계 장치를 관리 감독하거나 지나치게 연구 위주이거나 세분화되어 있는 일 역시 부자가 되기에 적합한 일은 아니다. 조직 내에서 이득 창출과 직접적 관련은 없이 그 조직을 유지 관리하는 일들 역시 부자 되는 길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일들을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싶지만 직업의 종류가 몇 만개나 되기 때문에 나로서는 벅찬 과제이므로 그 골격 형태만 밝힐 수 밖에 없다. 명심할 사실은, 형태는 컨베이어 벨트 앞의 일 처럼 보이지만 본인의 생각에 따라서는 콘베이어 벨트 밖으로 빠져 나갈 수 있는 일들도 많다는 것이다.

 

 

 

<모던 타임스>에서 주인공이 다섯번이나 실직하면서 가졌던 직업들은 공장 노동자, 조선소 노동자, 경비원, 철공소 정비사 조수, 웨이터 이었다. 조선소 노동자는 작업개선을 많이 연구하여 장인이 되면 더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다. 철공소 정비사 조수는 경험을 축적하면서 나중에 철공소를 차릴 수도 있다. 웨이터는 틈틈히 요리를 배워 진로를 바꿀 수도 있다. 나는 단순 노무직이라고 하여도 나중에 독립하여 사장이 되는 데 있어 밑거름이 되는 분야들을, 봉급도 많이 주고 복지환경도 좋은 곳에서 단순 조립공으로 일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좋게 생각한다. 부자가 되려고 한다면 말이다.

 

 

 

하나 더 부언하면, 직업을 선택할 때 백만장자들의 현재 직업을 그대로 따라 하는 어리석음은 절대 갖지 말아라. 그들이 현재의 일을 하기까지에는 그 전의 초라한 단계들이 있음을 명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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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