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블로그2013. 9. 9.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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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로써 필자가 가장 존경하는 철학자인 쇼펜하우어의 삶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쇼펜하우어)는 1788년 2월 22일 단치히(Danzig)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네덜란드계 혈통을 가진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사업가(은행가)이며, 볼테르의 사상에 매료되어 있는 브루주아 였습니다. 어머니는 여류작가였으며, 후에 그와 충돌이 일기도 합니다.(자식의 총명함을 시기한 나머지) 또, 그의 어머니는 말년에 바이마르에서 살롱을 열었는데, 그곳이 그가 괴테를 위시한 문인들과 친분을 갖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1793년, 단치히가 프로이센에 합병되자, 그의 가족들은 함부르크로 이주,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1805년까지도 쭉 거주합니다.

쇼펜하우어는 교육적으로 비정기적인 교육들을 주로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친구에게 맡겨져 2년간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고, 그 후 얼마간은 그의 부모님들과 함께

유럽 곳곳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힙니다. 그로 인해 그가 직접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고 술회 하기도 합니다. (직접적인 지식이란 그 지역의, 그 지역의 지식인들의 지식, 즉 산지식을 뜻 합니다.)

그리고 1805년, 그의 아버지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합니다. (음모론자들은 그(쇼펜하우어)의 어머니가 독살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필자는 돌연사로 추측.) 그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사업가의 길을 걷게되나, 얼마 가지 않아 어머니의 동의를 얻고 학업을 다시 시작합니다.

고전 문학, 물리, 화학, 식물학 등을 공부하였고, 그 과정에서 읽은 플라톤과 칸트가 그의 인생을 뒤바꿉니다.

그는 베를린 대학으로 가,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들 피히테, 슐라이어마허의 강의를 청강합니다.

그러던 중, 슐라이어마허의 강의 내용 중 일부인 "신앙을 갖지 않는 한 결코 진정한 철인이 될 수 없다"에 회의를 품게 되어, 맹렬한 비판을 하게 됩니다.

또 그러던 중, 프로이센(베를린은 프로이센의 도시입니다.)이 나폴레옹에 항거하여 대학이 폐쇄 됩니다.

그리하여 루돌슈타트(Rudolstadt)로 피신하여 그의 첫번째 논문 "충족 이유율의 네 가지 근거에 대하여"를 출판합니다. 이를 계기로 예나 대학으로부터 박사 학위를 받게 되고, 당대의 대시인 괴테로부터 찬사를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반 대중들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지요. (사실 쇼펜하우어가 가장 바랬던 것은 학문적으로 대중들에게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일생의 꿈이었지요. 먼 훗날 말년에 가서 니체, 부르트하르트 등이 그의 큰 영향을 받고, 대중들도 그를 인식하며 추종자들이 생기면서 꿈이 이루어지긴 합니다만.)

그 후 1814년 5월 부터, 쇼펜하우어는 다시 드레스덴(Dresden)으로 이주하여 그의 첫번째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집필 됩니다.

하지만 원래 천재들은 후대에 가서나 인정받듯, 쇼펜하우어도 그렇게 평탄한 인생만을 살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1819년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출판되었을 때, 몇 권만 팔렸을 뿐, 나머지는 휴지조각처럼 매각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책 덕분에 그는 베를린 대학의 강사 직위를 얻게 됩니다.

여기서 당대 최고의 철학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을 만나게 되고, 그의 인생도 뒤바뀌게 됩니다.

유명한 일화 중 하나로, 그가 헤겔의 철학과 자신의 철학의 정면대결을 위해서, 헤겔과 강의 시간을 맞추어 학생들에게 선택을 강요하게 되지요.

하지만 아쉽게도 쇼펜하우어는 견고한 헤겔의 권위를 쉽사리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3번에 걸쳐 이러한 시도를 반복하나, 모두 완패하고 맙니다.

그 후 그는 베를린 대학을 떠나, 쓸쓸히 고독한 생활을 맛보며 자신의 저서에 각주를 달거나, 암시된 주제를 더욱 부각 시키는 일, 다른 책들을 집필하는 일만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자연 가운데서의 의지에 대하여",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 문제"등을 집필하고,

자신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 2판을 출판합니다.

그 후, 칸트(Immanuel Kant)흄(David Hume)의 저서들에 대한 번역 계획도 있었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과 흄의 저서 "자연 신앙에 대한 대화"에 대한 주해("부록과 추가")를 간행 합니다.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과 흄의 "자연 신앙에 대한 대화"가 원래 번역 하고자 했던 책들입니다.)

독자들은 이 "부록과 추가"의 예증, 탁월한 문장능력 등에 매료되어, 그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의로서의 세계"도 함께 읽게 됩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쇼펜하우어의 꿈의 밑바탕이 됩니다.

이로써 그가 잡지에도 실리고, 유럽 각 대학 및 미국 대중들도 그의 철학에 대한 탐문, 강의 등을 시작하며 그의 추종자들도 늘어갑니다. 그러던 중, 1848년 프랑스의 2월 혁명, 독일, 오스트리아의 3월 혁명 등으로 빈 체제가 무너지면서 대중들은 인생의 공허함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점점 매료 되었습니다. 그의 명성은 최고조에 달하며,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등이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으며 염세주의 철학의 시조이자, 세계역사에 크게 한 획을 긋고, 1860년 9월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나이 72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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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