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SMOS
"어려서 죽은 아이보다 더 오래 산 자는 없다. 팽조(彭祖)도 젊어서 죽었다. 하늘과 땅이 내 나이와 같고, 만물은 결국 하나다." - 장자, 기원전 3세기경 , p 389
-칼 세이건.. 내 기억속에 그의 이름을 상기시킨건 한달전 Contact라는 SF 드라마였다. 한 여성이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과 세상엔 분명 나 혼자가 아닐 것이라는 믿음으로 천문학에 입문한 주인공을 그린 영화다. 결국 지구라는 작은 섬 하나에 전파로 외계생명체의 신호가 도달하고 그 외계인은 그들과 만날 수 있는 우주선을 건립하기로한다. 50만광년 떨어진 그곳을 향해 갈 수있는 우주선이 마련되 그녀는 모험을 떠나고 외계인과 조우를 한다. 그러나 지구에서의 시간은 단지 큰 구모양의 우주선이 물속으로 자유낙하하는 그 찰나였다. 그러나 60억명이 본 광경과 그녀가 체험했던 우주여행의 차이를 위해 직접 여행을 하지 않은 60억명의 사람들은 그녀에게 우주에는 인간이라는 문명만이 외로히 사는 신이 내린 곳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는 50만광년 떨어진 곳에 우리와 같이 외로히 그들의 문명을 꽃피운 곳이 있다는 의지를 꺽지않고 그녀가 50만년을 갔다 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과학적 자료가 나온다. 구 내부를 촬영하는 녹화시간은 50만년의 길이에 해당하는 노이즈가 찍혀있었다. 그리고 그 영화의 감독은 칼세이건에게 그 영화를 헌정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성(神聖)의 개념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서 다음과 같은 측면을 발견하게 된다. 감추어진, 동떨어진, 미지의 원인으로 인한 현상에 접하게 될 때, 사람들은 '신(神)이란 단어를 흔히 사용한다. 기존 원인의 자연적 근원인 이치(理致)의 샘이 손에 잡히기를 거부할 때, 사람들은 이 신이라는 용어를 자주 기대게 된다. 원인에 이르는 실마리를 놓치자마자, 또는 사고의 흐름을 더 이상 쫒아가지 못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원인을 빈번이 신의 탓으로 돌려서 당면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때까지 해오던 원인 탐구의 노력을 중단하고는 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현상의 결과를 신의 탓으로 돌리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무지를 신으로 대치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는가? 이재 '신'은 인간이 경외심 가득한 마음으로 듣는 데 익숙해져버린, 하나의 공허한 소리일 뿐이다."-폴 하인리히 디트리히 홀바흐 남작,자연계,1770년 p.328
-어렴풋한 기억으론 중학생 때였다. 우리집은 조선일보를 구독하고 있었는데, 나는 신문보는 걸 좋아해서-본지는 안보고 주식시세표와 토요일 책 특집,그리고 광고면을 봤던 기억난다. 물론 기억이 왜곡되었을수도 있지만- 신문지상에 커다란 광고가 책 광고가 실려있었다. 코스모스라는 이름이 매료되었다. 사실 우주에 관한 책이라 사회적 인식과 내가 좋아하는 기호에 대한 타협으로 지금까지 그 책을 내 손에 쥐어본적이 없었다. 비로소 10년이 지난날 책을 탐독하였다. 그리고 장대한 우주의 대서사시를 마치고 서평을 적어보고자 한다.
과거 중국이 나침반을 발명하고 과학의 강대국으로 거듭나게 되었다가 퇴보할 때, 중국기득권자들은 유클리드와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검열한 후, 태양 중심 우주관을 속이고 덮어 두는 데 온 신경을 썼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속셈에서 였다. 과학이 인도, 마야, 아스택 문화권에서 빚을 보지 못했던 것도 이오니아에서 과학이 쇠퇴한 이유와 마찬가지로 만연된 노예 경제의 병폐 때문이었을 것이다.- p.373
-책 제목이 너무 매력적이다. 가을을 알리는 코스모스 꽃을 연상했을 것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책을 읽기전에 내용을 상상해본다. 우주를 코스모스처럼 그려놨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책을 열었다. COSMOS는 어원을 풀자면 그리스 어에 유래된 '우주'라는 뜻의 대명사라고 한다. 코스모스의 꽃의 가지런한 꽃잎의 무늬와 칡흙같은 어둠이 무엇이 공통점이 있을까 했지만 이러한 단어 규정은 큰 의미가 있다. 기존에 우주를 바라 볼 때 언제나 미지의 세계, 신이 관장하는 영역-물론 우리 땅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렇게 부르고 알수 없는 혜성이 갑자기 다가오는 말 그대로 혼돈(Chaos)이었다. 그러나 이 코스모스가 정의 되면서 엄청나게 크고 무질서한 카오스의 영역이 조금씩 질서정연하고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코스모스의 영역이 되어갔다. 예를 들자면 2100년전 아리스타르코스의 지동설 주장은 천동설의 신성시되고 진리처럼 여겨지던 세계에서 천동설에서 말하는 행성이 본궤도에서 돌면서 갑자기 자신의 진행방향을 멈추고 다시 되돌아가는 운동을 하는 것을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리스타르코스가 지동설을 제시하면서 이것이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운동임을 증명한 것은 행성이 무작위적으로 뒤로가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해냄으로서 코스모스의 세계를 한 뼘 넓혔다. 그리고 저자의 한탄도 느낄 수 있다. 만약 오늘날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남아있다면, 좀 더 우주를 향한 우리의 지식과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평화로울 것이라는 한탄이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는 고대이집트의 번영 이면에 담긴 그 당시의 인류가 알고 있는 지식의 총집합이라고 할 정도의 방대한 양과 다양한 현자들의 연구를 도왔던 곳이다. 그곳에는 과거 이오니아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등의 다양한 저서를 필사 혹은 자필서가 구비되어 있었고 오늘날 인류가 알고있는 코페르니 쿠스의 지동설과 뉴턴의 법칙과 같은 자연의 법칙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비록 저자의 이름은 달라졌을 테지만, 내용은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지나쳐간 현자들이 좀 더 큰 성취를 했을 것이고 인류의 우주를 향한 열정은 조금이나마 넓게 퍼졌을 것이고 외계 생명과의 조우도 빨랏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은 고대이집트가 쇠락하면서 모두 쇠락하고 마지막 교수인 히파티아의 죽음으로 지식의 암흑기가 인류의 지성을 덥는다. 그리고 천년이 지난 이후 케플러,뉴턴,하위헌스,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지성의 재도약으로 코스모스에 대한 확장은 다시 일어난다. 모두 뛰어난 천재이지만 나에게 뉴턴은 겸허하게 하는 인물이다. 뉴턴은 비록 정규교육 과정에서 산만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리고 22세의 나이에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미적분을 발명했다. 종이위에서 3차원의 건물을 지어서 이러한 면적을 계산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특수 상대성 이론의 개괄은 빛이라는 유한하면서 무한한 개념을 도입하여 세상의 이치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감탄스러웠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세상은 과거보다 더 발전한다면 내가 젊은 나이에 이뤄놓은 것은 비록 내 능력이 평범하다지만 세상에 이치를 설명하거나 도움을 줄 수 있었던 일이 무엇일까? 난 짧고도 긴 일생 동안 무엇을 했을까? 나의 대답은 참으로 이전에 이뤄놓은 사람에 비해서 보잘것없었다.
그리고 코스모스의 내용에서 빼놓을 수 없던 것은 우리 태양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의 저서는 1980년에 발간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치를 발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화성에 대한 탐사 이야기나 목성의 위성 중 유로파라는 위성, 그리고 지구형 행성과 목성형 행성의 특성 분류는 오늘날 내려오는 정설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유로파라는 곳에는 물이 얼음으로 되어있을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유추하는 과정은 칼세이건만이 가진 인문학적인 과학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태양계의 이야기를 지나 태양을 제외한 우리와 가장 가까운 별을 찾아가면 4.3광년 떨어진 알파 센타우리를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와 이웃한 은하인 안드로메다(M31)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 점 커지는 카테고리에서 독자로 하여금 통찰을 얻게 한다. 그가 알고 있는 커다란 범주와 원소,원자와 같은 아주 작은 범주를 비교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크기에 대한 착각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마치 선문답 같지만 우리가 크다고 느끼는 것은 실제로 크지 않고 우리가 작다고 느끼는 것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우리 지구, 우리 은하는 내가 알고 있는 커다란 우주가 단지 해변에 흩뿌려진 백사장이고 그 하위범주가 하나의 모래알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몇백만 광년은 단지 백사장에 모래와 모래 사이의 간격이고 우리가 현미경으로 원소,원자,쿼크,중성자 이러한 무한소(無限小)로 쪼갠 곳에서도 비록 작지만 우주의 축소판이 들어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작디 작은 파란 반점위에 서서 마치 세상에 전부인양, 자신의 욕심을 꼭 채워야 하는 강박증은 얼마나 불쌍한 착각인지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작다고 느끼는 것과 약하다고 느끼는 것이 실제론 그렇지 않고 얼마나 존엄한 것인지 느낄 수 있다. 마치 시간이 없다는 변명은 영겁에 시간이라는 풍요로운 반찬을 앞에 놔두고 반찬투정을 하는 꼬마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좀 더 행동하는 양심의 대한 가치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손에 쥐기 전까진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비평만 할 뿐 행동은 하지 않았던 소극적인 사람이었지만, 이 책을 덮으면서 행동의 가치를 좀 더 알 수 있었다. 고요한 구름이 움직이는 것은 빨라보이지만 우리 땅이 움직이는 것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지구의 자전 속도는 29.6km/초- 자연은 커다란 움직임도 우리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고 작은 변화를 크게 느끼게 하는 신비스런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던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행성이 등속원운동만 한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고집했다. 그런데 그는 번번이 행성 운동의 관측 결과를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할수 없음을 발견했다. 그때마다 그는 원 궤도로 다시 설명하려고 무진 애를 썻다. 그렇지만 피타고라스학파와 달리 케플러는 현실세계에 대한 실험과 관측의 중요성을 깊이 신뢰했기 때문에 행성의 겉보기 운동에 관한 상세한 관측 자료에 따라 원 궤도 운동이라는 전제를 포기했다. 행성들의 궤도는 타원이었다.p. 369
->오늘날 많은 학자나 경제전문가들은 물론 나도 포함되겠지만 보이지 않는 위험의 실체적 존재를 입증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겠지만 그들의 척학에 대한 유연성이 미흡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점에서 큰 통찰을 얻는다. 과거나 오늘이나 인간이 가지는 뻔뻔함은 유전을 거듭해 가져온 기질이라는 것을 느꼈다. 즉, 과거에 겨우 설명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오늘날 설명 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 유연성을 마음속 깊이 간진해야겠다는 것을 피타고라스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배울 수 있다.
- 칼세이건은 만약 외계인을 만난다면 그들은 아주 무서운 존재나 정복자일 확률 보단 아주 상호교류에 능통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룩한 문명은 5천년 남짓하지만 다른 문명을 만날 경우 약 100만년 정도 문명의 괴리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입장을 바꿔 본다면 그 외계문명이 우리 인류에 비해 장구한 시절을 잘 견뎌 냈다는 증거는 폭력적이고 호전적이지 않다는 증거가 되고 그들로 하여금 다른 문명의 만남에서 그들의 발전양상보다 훨씬 높은 문명을 만날 수 있다는 겸손함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결코 우리와 비슷한 형태의 몸의 모양을 가지진 않을 것이라고 한다.
ps : 코스모스는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많은양을 읽었다. 그러나 결코 따분하거나 힘든 책이 아니다. 인류의 장구한 대서사시를 700페이지라는 가벼운 양으로 읽는다는 것은 칼세이건이 지닌 인문학적 통찰과 그가 연구한 코스모스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이렇게 멋진 책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생애는 무신론자에게도 비판을 받고 유신론자에게도 비판을 받았다. 아마도 그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기 위해 노력을 했기 때문에 그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양비론의 관점이 아닌 그가 느끼고 생각하고 연구한 것을 세상에 많은 독자들에게 알리려 했을 뿐이었다는 점이 나에게 더욱 깊은 여운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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