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블로그2013. 8. 20.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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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다해도 이길을..'중 박영립 변호사님 사법고시 합격수기입니다.
 
 
글머리에
 
 진정 이 사회와 모든 분들께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펜을 듭니다.그러나 막상 펜을 들고 보니
저의  수험기간 동안 커다란 힘이 되고 길잡이가 되어 주었던 선배님들의 합격기에 혹은 누가 되
지 않을까,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역겨움이나 분노를 자아내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또한 이제 그
만  묻어두고 싶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지난날들, 그러나 오늘의 저를 있게 해준 소중한 날들
을 반추하려 하니 만감이 교차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저의 그 동안의 평범한 생활 속에서 얻
은 경험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데 부족한 문장 실력으로 개념화하고 문장화하려 하
니 어색한 마음이 앞섭니다. 

운이 좋았고 이 사회와 수 많은 분들께 물심양면의 많은 도움으로 조그만 결실을 맺었다 하여 합
격기를 쓴다는 것이 어쩐지 건방진 생각 같고 정말 어려운 처지에서 공부하시는 많은 불들께 송
구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읽으면서 우리의 지난 날을 잠깐 뒤돌아보고 반성과 분발의 계기로 삼아 
밝아오는 내일을 준비하고 설계하고 싶은 충동에서 감히 펜을 들게 외었으니 넓은 이해와 관용
빌겠습니다.
 
 
서울의 하늘 밑
 
 전남 담양의 조그만 산골 동네에서 태어나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은 했으나 진학을 포기하고
광주에 있는 조그만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객지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 떄 사무실 책상 위에서
잠을 자던 처음 며칠 밤은 바닥으로 떨어졌으나 곧 습관이 되어 잠버릇하지 않고 곱게 자는 습성
이 길러졌습니다.
그 해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이듬 해에 대바구니장수 아주머니들을 따라 무작정 상경했습니
다.
 
밤 새워 달려온 완행열차에서 내린 새벽의 노량진역은 하얗게 서리가 내려 잇었고, 2월 말의 찬
바람이 겁먹은 15살 촌놈을 더욱 춥게 만들었습니다.
그 길로 앞 뒤도 없는 전차에 몸을 싣고 청량리에서 일하고 잇는 친척을 찾아 갔습니다. 
 "당장 오늘 저녁차로 내려 가거라, 서울이 어떤 덴데..." 

친척의 첫 마디였습니다. 무언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막연하나마 화려한 설계도 해보앗고 금의
환향도 꿈꾸어 보았던 서울이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서울이었고 친척 역시 시골 소문과는
달랐습니다.
 "죽어도 못 내려 갑니다. 죽어도..."

 무슨 일이 어찌되던 내려갈 수만은 없었습니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겨우 겨우 올라온 서울인데, 내려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
다.
그리하여 간신히 얻게 된 일자리는 서울역 보근의 여관이 었습니다.
얼마 후에야 그 곳이 숭남동이라기 보다는 [양동]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었고 여관이란 곳이 
나그네들의 숙소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둠의 자식들]의 [카수 영애]등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럭저럭 3개월이 지났을 무렵 시골에서 수학여행 온 중학생 단체손님을 받았습니다.
여관 측에서는 학생들의 점심을 배달해 주기로 하고 그들은 창경원을 구경하러 떠났습니다.
얼마 후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저는 무척이나 전화라는 것을 받아보고 싶던 터라, 때는 이 때다 싶어 뛰어가 받았습니다.

 "열 두시까지 [근천문] 앞으로 점심을 배달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분명 그렇게 들은 것 같았는 데 몇 통의 전화가 다시 오고, 두시가 훨씬 넘어서 점심이 배달
된 후에야 저는 비로소 약속 장소가 [근천문]이 아니고 [근정전]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좌우간 그 일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여관 주인과 수학여행 인솔자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고, 앞
으로 또 꾸중들을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 놈의 [근정전]인 가가 도대체 어디에 붙어 있는 무엇이길래...
런닝셔츠와 슬리퍼 차림으로 여관을 아무 말도 없이 뛰쳐 나왔습니다.
어린 저의 판단으로는 그것이 최선인 듯 싶었습니다.
여관에서는 월급이 없었기 때문에 제가 손에 든 것이라고는 손님들이 준 5월, 10월의 팁을 틈틈
이 넣어 둔 진흙 저금통 뿐이었습니다.
우선 급한 김에 나오긴 했으나 그 꼴로는 아무데도 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 저금통을 깼습니다.
600원 정도 들어 있었습니다.
남대문 시장에 들러 남방셔츠와 운동화를 산 후 또 한번 청량리행 전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번 찾아갔을 때 내려가라던  일이 생각나 그대로 돌아서서 노량진 대바구니장수 아
주머니들께로 향하였습니다.
그 곳에도 저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미 다른 곳으로 장사를 떠나버린 후였습니다.

 이제는 갈 곳도 없었습니다.
이 넓은 서울 방에서 철저하게 혼자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거리에는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습니
다.
저의 발걸음은 서울역 앞 지금의 [대우빌딩] [남대문교회] 등이 자리잡고 있는 잔디밭 위에 멈췄
습니다.
어머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고향생각이 났습니다.
그 곳에서는 잠깐이나마  내가 몸담고 있던 여관이 빤히 바라다 보였습니다.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고 들어갈까 하는 생각도 해봤으나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6월이었지만 밤이슬 때문에 잘 수가 없어 신문을 주워서 깔고 덮고 잤습니다.
자다가 추워서 움직임녀 나을 것 같아 돌아 다니다가 파출소 순경아저씨에게 야단을 맞고 골목
으로 들어가 음식점에서 내다버린 온기가 있는 연탄재를 안고 그 밤을 지새웠습니다.

 다음 날은 일자리를 구한답시고 남대문시장, 서울역 부근 일대를 두리번거려 보았으나 헛수고였
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발 밑에 굴러다니는 신문쪼가리가 보였습니다. 무심코 던진 시선은 [직업소
개]라는 네글자에 박혔습니다.
저는 신문을 집어들고 쏟아지는 비도 아랑곳 없이 공중전화를 찾아 신문광고란에 난 직업소개소
에 전화를 했습니다.
서울은 참으로 자비로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제게 서울의 [직업소개소]라는 곳은 자고 먹을 수 있는 일자리를 소개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전 남산 위에 올라가서 서울시내를 바라볼 때는 셀 수도 없이 엄청난 건물과 사람들 중에 나
하나 잘 곳, 아는 사람 하나 없는가 하고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는데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
다.
 그 날 저녁은 무작정 찾아든 분식센타에서 대충 지내고 아침 일찍 전화로 가르쳐 준 곳으로 묻
고 물어 찾아 갔습니다.
세운상가 부근에 있는 직업소개소에서는 소개비 천원을 요구하였으나 제게는 100원 정도 밖에
없어 월급타서 갚겠다고 눈물로 하소연하여 종로 3가 단성사 부근의 음식점에 일자리를 얻었습
니다.
나중에 이 곳도 [종삼]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일자리를 구해 준 직업소개소
에 고맙다는  인사도 여러차례 했고 그들도 제가 있는 곳으로 잊지 않고 음식을 주문해 주었습니
다.
거리는 약간  멀었으나 정성껏 배달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돈은 항상 주지 않고 주인에게 가서 얘기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월급날에 가서야 직업소개비 외상 900원보다 조금 많던 저의 월급에서 그들이 먹던 밥값이 충당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럭저럭 3개월 정도 흘렀을 무렵, 우연히 고향의 국민학교 동창을 만났습니다.
양복점에 다니던 친구가 동대문 시장에 심부름으로 전차를 타고 가다가 길을 건너던 저를 알아보
고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달려왔던 것입니다.
기술을 배우고 있다는 그 친구 얘기를 듣고는 일자리를 부탁했습니다.
잘 곳도 먹을 것도 없을 때는 가릴 것이 있을 수 없었으나 저도 이제는 서울에 와서 어언 반년이
지나고 보니 막연하나마 앞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 후에 그 친구와 같은 양복점에 있게 되었고 그 때까지 여관에서나 음식점에서 항상 [꼬마]
로만 불리던 저는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양목점에서 보낸 그 해 겨울은 제게는 유난히도 추웠습니다.
양복점 공장 한 켠에 자리를 마련하고 누우면 춥고 배가 고팠습니다.
양복점에서 받은 돈으로는 쌀을 사고 소금과 막간장을 조금 사고 나면 없었습니다.
이 때부터 거의 매일같이 1년이나 계속된 감기가 축농증으로 되어서 지금도 코가 완전하지가 못
한 형편입니다.
이 당시에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을 월급 무렵에나 간혹 먹는 콩나물국과 어쩌다 얻어 먹어 보는
[샘표간장]이 었습니다.
빈병을 가지고 가서 조금씩 사먹는 막간앙에 비하면 [샘표간장]은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습
니다. 

 그러나 그 곳은 기술 정도에 따라 월급이 달랐으므로 내일을 생각할 수 있었고 가능성이 있었습
니다.
기술자 선생님들은 자신들을 거둘 수 있을 정도의 기술은 강요하다 시피 가르치나 그 이상은 잘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다 가고 없는 밤을 꼬박 새워 조금씩 보고 들은 것을 익히면서
소위 말하는 [기술자 곤조](?)가 어떠한 것인가를 차츰 깨달을 무렵 바지를 간신히 만들 수 있었
습니다.
양복점에 들어온지 약 6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습니다. 

 이제는 양복점 공장 자취생활에도 이골이 나 있었고 월급도 저축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차츰 안정이 되면서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과 동생들, 우리 식구가 서울의 한 구석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당시 17살이던 저는 9급(당시 5급)공무원 월급 수준의 거의 두배에 가까운 수입을 올린 적도 많
았습니다.
양복점 주인은 기능올림픽에 나갈 준비를 위해 윗저고리 등의 기술을 배우도록 권유했으나 기술
배우는 동안 다시 수입이 줄어들므로 망설이고 있을 때 기성복이라는 거센 유행의 물결이 밀어닥
치고 있었습니니다.
 또한 양복점 기술자는 하루 일의 양에 따라 수입이 정해지므로 나이가 들수록 수입이 오르지 않
고 오히려 줄어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교복 입은 아이들에 대한 부러움이, 사회와 부모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점점 커가고 있었
습니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양복점을 그만 두어 버렸습니다.
막연한 계획은 막연한 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인지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할 곳을 찾아 보았으나
헛수고로 끝나버렸습니다.
 이리하여 정해진 일자리 없이 약 반년 동안을 노동판, 버스승객 계수원, 가축병원, 전선회사 임
시직공,신문보급소 등을 닥치는대로 전전하였습니다.
가축병원에 있을 때는 애완용 개들이 웬만한 사람들보다 훨씬 고급으로 먹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제는 공부고 뭐고 양복점 외에 일정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구로동 부근의 공장지대 일대를 하루에도 몇 바퀴씩 돌며 기웃거렸으나 어쩌다가 모집공고
가 있으면 자격은 대부분이 중졸, 고졸 이상이었습니다.
거짓으로 이력서를 꾸며 제출하기도 해보았으나 막상 졸업증명서를 요구하는 데는 포기하지 않
을 수 없었습니다.
제게는 이 사회가 중요시하는 것은 졸업장이지 결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으며 실업자가 어떠
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되었습니다.

 이러던 중에 어머님께서 일을 거들어 주시던 댁에서 이불 솜을 파는 동대문시장 점원 자리르 소
개해 주었습니다.
이름과 나이, 고향 등을 묻고 학력을 물었습니다.
중학교 중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더하고 나서 신원보증서와 주민등록등본을 갖추어 냉리 아침 9시까지 나오라
고 했습니다. 
그런 절차없이 떠돌아 다녔던 저는 [신원보증서]란 대서소에 가서 양식을 사다가 간단하게 적어
내는 것인 줄만 알고 이제는 취직이 되나 싶어 그 길로 대서소에 물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제 주위엔 재산세 얼마를 내면서 저의 신원을 보증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쉽게 풀리나 했더니 역시...
다음 날  저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돌아서려니 앞이 막막하고 공연한 분노가 일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러한 업종에서는 하루에 금전을 꽤 다루기 때문에 보통 필요한 서류인 데
도 그것을 모르는 저는 [아저씨, 저의 고향이 ()()()이기에 신원보증서가 필요한 겁니까? 그렇다
면 어린 저의 마음에 커다란 못이 되겠습니다. 죄송합니다.]하고 맥없이 돌아설 때였습니다.

 "어이, 여보게" 뒤돌아 보니 주인 아저씨께서 손짓을 하셨습니다.
 "잘 할 수 있겠나?"
 "네, 장담은 못하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날로 점원이 되었습니다. 그 곳 생활을 익히면서 성실과 신용이 살아가는데 가장 큰 자본이
며, 똑같은 크기의 같은 업종인 점포에서도 세금 등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보고 무엇을 알아야
만이 자기의 정당한 이익을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사람들은 공동생활을 하면서 서로르 오랫동안 사귀어 평가하기도 하나 대부분은 각자가 가진 외
형적인 어떤 기준으로 먼저 선입견을 가진 후에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동안 국민학교 졸업 학력으로 얼마나 많은 벽에 부딪혀 왔던가...
저도 남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누구에게 경리학원 얘길 듣고 어떻게 할 줄 졸라 하던 차에 [검정고시학워]광고를 보았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교복
 
 "해낼수 있을까"하는 의구심도 있었으나 지금 아니면 영영 할 수가 없을것 같았습니다.
얼마를 생각하던 끝에 어머님께 말씀드렸습니다. 
 "9개월이면 됩니다. 제게 9개월만 주십시오. 중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하늘이라도 훨훨 날을 것 같습니 다."
 
주인 아저씨께도 말씀을 드렸더니 너무나 고맙게도 오전시간을 할애해 주셨습니다. 
제 나이 스무살, 국민학교를 졸업한지 8년, 국민학교 동창들이 대학교 2학년, 지금은 군에 가 있
는 남동생이 중학교 2학년 때인 72년 9월 6일, 종로 2가 부근에 있는 중학교 과정 검정고시 학원
에 나갔습니다.
겸연쩍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여 맨 뒷 좌석에 앉았는데 첫 시간이 수학시간으로 방정식을 푼다
고 했습니다.
 
활자체 대문자도 익숙치 못한데 꼬부랑 글씨 x, y가 어렵고, 좌변에서 우변으로 넘으면 부호
가 어쩌고 하는데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려도 알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과목도 비슷하게 보내고 학원 문을 나섰습니다.
눈 앞이 캄캄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 알아보니 내가 다니는 반은 이미 3개월 전에 개강한 반인데 학생수가 적어 자주 합반
하다 보니 진도가 꽤 나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수학이 가장 문제였기에 그 날 배운 걸 모두 외어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모르는 것은 동생에게도 물어보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은 대학 다니는 국민학교 동창 친구가 왔길래 모르는 것을 밤 새도록 물어 보았습니
다.
바로 옆에서 그것을 듣고 계시던 어머님은 그 날 저녁 한잠도 못 주무시고 국민학교 다닐 때는 성
적이 남에게 별로 떨어지지 않았는데 못난 부모 때문에 저렇게 엄청난 차이가 나다니 하시면서
우셨다고 제가 합격한 후에 말씀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오전 중에 학원에 나갔다가 뛰다시피 하여 가게로 돌아오면 오후 2시경이 되었습니다.
가게 인근의 시장 상인들은 제가 가게에 가면 "아, 지금 2시군" 할 정도였습니다.
검정고시학원 광고에는 9개월 속성 과정이라고 했으나 몇 개월이 되었던 국가에서 시행하는 검
정고시 시험에 합격해야만 자격이 인정되었습니다.
73년 7월 말경에 시험이 있었습니다.
불안했습니다. 초조했습니다. 될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이 책만 붙들고 있었습니다.
식사할 때도, 화장실에 갈 떄도, 버스 속에서도, 길에 다니면서도...
사법시험 준비를 할 떄도 이 때 만큼 열심히 하지는 못했습니다.
 
 시험을 얼마 앞두고는 어머님과 여동생에게 모든 살림을 떠맡기고 그 가게를 그만 두었습니다.
이미 양복기술자가 된 여동생은 못난 오라버니를 수없이 원망했으리라.
이런 상황이었기에 제게 남은 길이라곤 합격 이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최고 득점으로 합격했습니다.
합격만 하면 뭔가 될 줄 알았는데 넘어야 할 산들은 더욱 많았습니다.
최고득점 덕분에 수업료가 면제되어 고등학교과정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74년 8월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도 무난히 합격은 했습니다.
다음 해 K대학교 상대에 입학원서를 냈습니다.
그 때 형편으로는 대학 다닌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기에 꼭 합격해야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해온 공부가 과연 정규 중, 고등학교에서 배운 것과 같은 것인지 궁금했고, 제 실
력이 어느 정도일지 비교해 보고 싶었습니다.
 
 역시 실력은 떨어져 불합격이었습니다.
다닐 형편은 못되었다 할지라도 불합격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데 후기에 응시하라는 간곡한 격려와 함께 각 대학교를 소개하는 진학관계 잡
지를 같이 공부했던 여학생이 보내 주었습니다.
그 때 진학관계 잡지르 처음 본 저는 대학이 그렇게 많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집에서 도보로 통학이 가능한, 지금은 모교가 된 [숭전대학교]에 원서를 냈습니다.
신의 뜻이었을까. 저는 법경대 수식으로 합격한 덕분에 꿈에 꿈 속에서도 그리기 어려운 대학생
이 되었습니다. 
 대학생! 몇년 늦긴 했으나 얼마나 가슴 부푼 단어인가. 그렇게도 입어보고 싶던 교복을 맞춰 입
으며 저에게 주어진 정규 학창생활을 알차게 보내리라 몇 번이고 다짐했습니다.
학교 측과 교수님들의 배려로 매학기 장학금을 받을 수는 있었으나 등록을 할 때마다 이번 학기
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대학생활을 지탱하기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저학년 시절에는  가정교사, 그룹지도, 월부서적되판 등을 해보았으나 신통치 않아 공부에만 전
념하기로 하였습니다.

 어머님께서는 그 일대의 삯빨래 등을 도맡아 하셨고, 용산시장, 노량진 수산시장, 잘품팔이, 새
마을 취로사업 등을 계속하셨습니다.
어머님과 자식과의 관계는 그래야 하는가?
어머님께서는 저를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치셨습니다.
저는 그 분께 어떻게 해드려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어려우신 생활 속에서도 성실하고 진지하게 삶을 사시는 그 분께 고개가 수그러질 뿐입니
다.
 
 또한 지금은 결혼하여 한아이의 어머니가 된 여동생, 한창 멋부릴 나이에 마음에 드는 좋은 옷
한벌 제대로 못 사입고 우유부단 하고 강단없는 오라버니 대신 가족의 생계와 학비를 담당했었습
니다.
제가 대학 3학견 때 동생이 결혼하던 날, 친구와 술 한잔하고 무기력한 저 자신이 원망스러워 눈
물을 흘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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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