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들리'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3.08.20 경향신문 이필상
배움블로그2013. 8. 20. 12:25
반응형

1월 28일자 경향신문의 "책읽는 경향"이라는 컬럼에서 이필상 교수의 독후감을 만난다. 법정 스님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는 인생의 지혜록에서, 그는 "신자유주의 참극의 해법"은 "따뜻한 자본주의"이어야 함을 말한다. 그러나 경제학자의 성급한 결론맺기가 혹여 불교사상의 아름다움을 흠내는 짓이나 아닐지 나는 우려한다. 경제는 종교적 계시도 아니고, 논리의 비약은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지난해, 모교도 아니면서 게다가 공대 출신으로서, 그 악명높은 대한민국 3대 마피아의 하나인 고려대 경영대학을 거쳐, 드디어 고려대 총장으로까지 선출되었다가, 수구들의 온갖 추악한 밀고와 모함을 헤어나지 못하고 마침내 불명예 제대를 해야 했던, 돈키호테 교수님의 저항정신은 높이 사줄 만하다. 하지만, 아마 경제가 아니라 원래 경영을 공부했던 까닭이겠으나, 그의 소위 "기업가적 리더쉽"에 대한 집착은, 시대착오적 영웅주의랄까 아니면 개인주의적 성공지상주의랄까... 그런 자아중심주의(egocentrism)에서 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비록 적들에 의해 "좌파적"이라 일컬어지는 그의 경제관 또한, 그 본질에 있어서, 이명박의 조폭적 족벌 경제관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나는 본다.


사실, 자아중심주의 또는 니-똥-굵다-사상은 철학과 역사적 사회인식의 부재에서 비롯한다. 경영이라는 이재(理財)의 기술(chrematistics)만을 익혀온 사람들에게, 그것이 비록 김영삼 류의 거창한 "국가경영"이나 김우중 류의 허무맹랑한 "세계경영"이란 선전으로 과대포장되었다 하더라도, "부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묻는 것은 마치 우물안 개고리에게 바다가 어찌 생겼는지 묻는 것처럼 무리한 일이다. 본질을 다루는 학문에서 요구되는 것은 말의 크기가 아니라 생각의 깊이인 것이다. 그래서 경영학과 달리 경제학의 모든 질문은, 질문을 품는 바로 그 순간 즉각적으로, 철학의 영역에 떨어질 수 밖에 없게 된다. 즉 경제학은 나와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끝 모르는 성찰이다. 사회(nomos - 인간의 질서)는 나에게 주어진 어떤 거부할 수 없는 자연(kosmos - 우주의 질서)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제의 문제는 사회라는 공간 속에 내던져진 내 개인의 행동이나 위치에 대한 지식(scientia)이 아니라, 내 개인이 속함으로써 이루어진 사회의 구조에 관한 의식(con-scientia)이 된다.


이필상 교수의 "개혁적" 경제에는, 우리가 그 안에서 살며 우리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경제체제"에 대한 의식 자체가 빠져 있다. 경제 없는 경제라고나 할까.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의 순수한 경제(economy) - oikos(집) nomos(질서) - 라고나 할까. 그러나 최소한 17세기의 몽크레티앙(Montchrestien, 1575-1621) 이후, 경제란 나라 전체의 경제를 뜻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국가의 물적(物的)구조로서의 경제체제가 고려되지 않는 경제활동이란 단순히 허구일 뿐이다. 그의 논조는, 역설적으로 그가 적으로 삼는 자들, 이명박과 소위 신자유주의의 개들과 같은 시각선에 있다. 그 위에서 모든 경제문제는 개인과 개별기업의 어떤 행태심리 내지 어떤 의사종교(擬似宗敎)적인 구원행위로 극히 단순화되어 있다. 수리(數理)적 단순화(simplification)라기 보다는 이재학(理財學)적 천박화(vulgarization)라고 부르는 편이 그 밑에 감춰졌을 포퓰리즘과 보다 잘 어울릴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이미 지난 정권 때부터, "노무현의 반기업적 정서"를 강력히 비난하며, "규제혁파, 노사안정, 조세개혁, 투명경영, 민생정치 등 경제주체들의 의욕회복과 시장 활성화"를 자극하는 "경제운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문화일보 2006-4-28). 고대 동문 이명박의 소위 "비지니스 프렌들리" 친기업정책이라는 사기는 고대 교수 이필상의 주장을 - 좌우를 떠나 어쨌든 그 표현으로 볼 때 -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베낀 것이다. 삽질경제에 맞지 않는 고급인력의 "눈높이"에 대해 이명박이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오래 전에 앞서, 그는 "청년백수여 눈높이를 낮춰라"며(세계일보 2006-6-2), 대한의 젊은 두뇌들이 3D 업종에 적극 매진하기를 독려하였다. 이-이 노동정책의 우스꽝스러운 단순함은 크메르루즈 폴포트의 인텔리겐챠 말살정책과 몹시 흡사하다. 킬링필드의 강제노동과 대운하의 막노동과의 차이는 극히 미묘하다. 그들은 왜 청년실업이 생기며 왜 기업탈출이 일어나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이필상의 유일한 가정이자 결론은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서 깨끗한 경제를 이루면, 아마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결국 무책임한 "시장의 논리"이다. 반대로 이명박의 유일한 야망이자 방법은 정치와 경제와 대한민국의 모든 금력과 권력을 "보이지 않는 검은 손"으로 장악하자는 결국 "독점의 음모"이다.


이명박에게도 그렇듯이 그에게 기업가란 거의 신(神)적인 존재이다. "기업가 정신은 경제발전에 생명을 불어넣는 자본주의의 혼이다"라는 중세적 이분법의 "정신우위론"은 사실상의 사대사상이며, "기업인들을 집단 매도하고 돌을 던지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라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성경말씀(요한 8:7)까지 연상된다. 정신의 육체에 대한 절대적 지배를, 따라서 청와대 십장의 노가다 국민에 대한 독재적 권력을 맹신하는 개독 이명박에게 있어서처럼, 이필상 교수에게 있어서도 "경제주체"란 오직 "기업가" 혼자 뿐이다. 노동자와 소비자와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와 사회는, 영웅화된 "기업가"의 둘러리이거나 뒷배경에 불과하다. 경제의 모든 자원은 기업가의 엘랑비탈(elan vital)을 북돋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즉 기업가의 탐욕을 위해 국민은 희생되어야 하며 국가는 복종하여야 한다...


"기업가 주체사상"이 국가에 요구하는 자유방임(laissez-faire)은 그러나 순진한 코스모폴리탄의 무정부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제국주의라는 늑대의 본성을 숨기는 양의 가면이며, 자본의 세계침략 야욕에 맞서 저항하는 각국 국민을 향한 협박이다. "전에는 군대를 양성해서 땅을 빼앗는 영토전쟁이 주였다면, 지금은 시장을 뺏어서 돈을 버는 경제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Economy21, 2003-12-5). 평화를 사랑해야 할 선비의 말씀으로서는 너무나 붉은 핏빛이 아름다운 역사관이며 세계관이다. 소위 경영학이란 것이, 특히 2차대전시 군사학과 심리전의 찌끄러기로서의 경영학을 구호물자 설탕포대와 같이 받아온 한국의 경영학이란 것이 - 덤으로 미쯔비시의 대동아 식민지 경영론의 쓰키다시도 좀 섞였겠지 - 태생적으로 팟시즘의 성향을 띨 수 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래서! 그래서, 절대다수 국민은 자기가 원하지도 않는 전쟁을 위하여 재벌군단의 수출전선에서 총알받이로 죽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시장논리"는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경제성장을 해야 하는지 결코 말해주지 않는다. 슘페터(Schumpeter, 1883-1950)의 창조적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지향하는 바와는 달리, 이필상-이명박의 군벌적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도 사회주의와도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아뭏든 전쟁의 끝은 승리의 영광이 아니라 살륙의 허무이며, 우리는 그것을 경제라고 부르지 않는다.


경제전쟁 영웅들의 멜로드라마에는 반드시 "좋은 기업가"와 "나쁜 기업가"가 있어야 한다. 그들은 또 "좋은 노동자"와 "나쁜 노동자"와 함께 천편일률적인 연속극을 만들어 간다. 소위 리더쉽이라는 이재학(理財學)적 능력주의에 의하면 경제가 나빠진 까닭은 나쁜 사람이 대통령을하고 기업가를 하고 또 노동자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기업가가 되고 또 노동자가 된다면, 경제는 동화 속 해피엔딩처럼 아름답게 맺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싸구려 환상은 명박-좋은-대통령-만들기나 삼성-좋은-기업-만들기와 같은 백색선전의 달콤한 독이 숨어있는 속임수일 뿐이다. 착한 상인은 착한 시장을 이루고 따뜻한 자본가는 따뜻한 자본주의를 이룬다는, 얼핏 듣기에는 너무나 그럴 듯한, 이런 사이비 논리는 단지 궤변에 불과하며, 시장과 자본의 본질에 대한 완전한 무지 또는 무시에서 비롯한다.


시장이란 인간에 대한 자연적 개인의 감정이 전달되는 곳이 아니라, 물건에 대한 사회적 인간의 욕구가 현시되는 곳이다. 빵장수가 빵을 구워 파는 것은 배고픔에 떠는 이웃 사람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돈벌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다 라고 아담 스미드(Smith, 1723-1790)는 국부론에서 말했다 (WN, bk. I, chap. ii). 그러므로 시장에서의 경제활동은 본질적으로 탈(脫)윤리적이며, 게임의 규칙이 아닌 도덕의 법칙을 우리는 그곳에 적용시킬 수 없고 시켜서도 안된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인간의 마음(心)이 아니라 자본의 물(物)에 기초한 경제체제이다. 자본이란 즉 "돈"으로 표상되는(symbolized) - 그래서 돈을 symbolon 상징이라 부른다 - 물건에 대한 사적 소유권(property)이다. 우리는 소유의 대상에 불과한 돈에게 선(善)하거나 악(惡)하라고 명령을 내릴 수 없다. 왜? 돈은 인격(人格)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나쁜 임금의 돈을 좋은 도둑이 훔쳐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그 돈은 좋은가 나쁜가? 아버지가 평생을 근검히 일해서 모은 돈을 아들이 노름으로 탕진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다면 그 돈은 좋은가 나쁜가? 돈 자체에는 도덕적 판단이 불가능하다 라는 것이 아담 스미드의 친구이자 프랑스 재상 뛰르고(Turgot, 1727-1781)의 명쾌한 논증이었다.


자본주의가 자본이라는 물의 내재적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은 이미 마르크스(Marx, 1818-1883)에 의해 철저히 규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 어떤 의인화된 성격을 부여하려는 것은, 지난날 고대 이집트와 같은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 황금에 파라오의 권위를 씌우고 백성들의 무조건적인 숭배를 강요했듯이, 오늘날 자본주의 착취구조의 모순을 교묘히 감춤으로써, 체제 내 노동자와 소비자로서의 인민(people - 개인의 집합이란 뜻 - 나는 민중이라는 낭만적인 용어를 쓰지 않는다)들이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만드는 이데올로기 선전일 뿐이다. 자본의 운동에 대해서는 도덕적 판단이 불가능하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 사회는 자본주의가 아니므로 자본이라는 사적 소유권도 없으며, 따라서 사유재산이 없는 그 사회는 공공의 재화(res publica)만이 있는 공산주의이다.


이필상 교수의 "따뜻한 자본주의"는 "따뜻한 기업가"에 의해서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많은 기업가들이 가정에서 또 일터에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좋은 사람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몇몇의 마음만으로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는 따뜻해지지 않는다. 체제 자체는 따뜻할 수도 차가울 수도 없다. 체제는 체제일 뿐이며 개인의 도덕성이 변수로 작용하는 함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나라 모든 사람들이 한없이 아름다운 나눔의 미덕을 가졌다면, 이미 우리의 경제체제는 더 이상 "자본주의"라고는 불리울 수 없는 가장 이상적인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따뜻한 자본주의"에의 꿈은, 그것이 체제를 자기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본주의의 차가운 실상을 감추려는 허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망교회 장로정권의 "가짜 사마리아인들"은 마치 자선이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설교하고 있다. (약속한 재산 헌납도 지키지 않는 꼴에...)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이며 존재적 조건으로서 프롤레타리아의 실업과 빈곤이 몇몇 부르조아의 선행으로 완화되리라 믿는 것은, 아침 신문 한 구석을 장식하는 미담은 되겠지만, 한 나라의 정책이 될 수는 없다. 수구언론이 즐겨 싣는 흐뭇한 이야기들은 오히려 "부자는 착한 사람 가난뱅이는 빌어먹을 놈"이라는 빈부의 인과론 내지 숙명론을 조장하여 계급차별을 심화시킬 뿐이다. 한편, 부자의 (그리고 부자교회의) 사적인 자선행위는 가난에 대한 국가의 무능을 부각시키는데 이용되며, 또 한편, "자비로운 부자"가 더 부자가 되어 더 자비로울 수 있도록, 부자를 위한 특혜의 핑계가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따뜻한 자본주의"는 광신개독의 손아귀에서 가장 냉혈적인 자본주의의 본색을 드러낸다. 아마 이필상 교수는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이라는 경제학자 마샬(Marshall, 1842-1924)의 따분한 방법론에서부터 그의 "인간적인 자본주의관"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본주의는 결코 휴머니즘이 될 수 없다. 더구나 이명박 류의 정경야합 매판족벌 자본주의는 인간 노동의 소외 뿐 아니라 아예 인간 본성의 파괴를 가져올 뿐이다.


우리가 원하는 나라는 몇 푼의 동냥 앞에 비굴과 복종이 강요되는 그런 사회가 아니다. 가난한 자의 존엄을 훼손함으로써만 부자들의 동정심이라는 새디즘이 충족되어지는 그런 위선과 변태의 사회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나라는 거지들을 위한 따뜻한 사랑방이 아니라, 차라리 차가운 공장바닥이라도 좋으니 정직한 노동이 정당한 댓가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이성(理性)의 사회이다. 우리의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은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따뜻한 자본주의"와 같은 무의미하고 무책임한 감상주의의 연가(戀歌)나 읊을 것이 아니라, 자본과 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경제의 범위를 가능한 한 축소하고, 도덕과 공동선(共同善)의 법칙이 적용되는 정치의 영역을 가능한 한 확장하는, 즉 국유와 사유, 공공과 민간, 시장교환과 직접분배가 최적의 동적균형을 이룬 그런 사회로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새로운 체제는 언제나 가능하다. 미래는 항상 열려 있기 때문이다. 마침 오늘날의 경제위기는 혁명없는 체제변혁의 좋은 기회가 된다. 그것은 미네르바 여신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운명의 미소일 것이다.

반응형
Posted by 스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