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블로그2013. 8. 20.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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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볼만 한 것, 사법시험에 도전
 
 호젓한 캠퍼스의 잔디 위에 누워 저 자신의 지난 날들을 반추하여 보았습니다.
밉기만 하던 교복입은 학생들, 당장 뒤집혀버리기만 바랬던 이 사회, 못나 보이고 원망스러웠던
부모님, 신을 저주하고 부정했던 나날들, 이 모든 것이 오늘의 제가 대학생이 될 수 있게끔 해준
소중하게만 느껴지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고 막막하기만 했던 것들이 하나 하나 풀린 것을 보면 어
떤 [절대자의 섭리]같은 것이 분명 있다고 믿어졌습니다.
오늘의 저를 있게 한 절대자의 뜻은 뭘까?
대학생활을 설계했습니다.
 
 대학 1학년 때에는 정규학교 생활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음미하기 위해 약간의 나이 차이는 있었
으나 자주 어울려 대화하고 미팅도 해보고, 술, 담배, 당구 등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대학 2학년이 되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저의 앞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한 이 사회에서 받은 도움도 만에 하나라도 환원해야 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선천적인 인맥도 금맥도 없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맨 몸뚱이 뿐이었습니다.
이 맨 몸뚱이를 가지고 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할 역할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해의식이 남달리 강한 사람들과 더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나 알찬 대학생활을
위해서나 한 번쯤 부딪혀보리라.
도약해보리라 사법시험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76년 4월 초, 방위소집명령서가 날아들었습니다.
저는 숙부님께 양자로 입적되어 있었고, 당시 숙부님 가족이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보충역으
로 편입되어 있다가 이번에 나온 것입니다.
먹루름이 끼는가 두웠습니다.
2학년이 되면서 운 좋게 맏게 된 외부 장학금은 액수가 많아 학비는 한시름 놓았다 했는데...

휴학을 하게 되면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은 뻔했으며 또한 복학이 걱정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름이 부름인지라 그 때 걱정은 그 때 하기로 하고, 일단 휴학을 하여 방위병으로 6개월
의 근무 끝에 76년 11월 말에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방위병으로 근무하면서부터는 남는 시간에 영어공부만하였습니다.
짧은 중, 고등학교 과정 때문에 영어 실력은 형편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는 여학생들의 눈초리가 여간 따갑지 않았으나 좀더 시간을 확보키 위해 일과가 끝나
면 방위병 복장을 한 채로 학교도서관으로 직행하여 영자신문과 TOEFL을 보았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적으로 하루에 2-3시간씩 공부한 덕분에 1차 시험에서 간신히 과라을 면할 수 있
는 실력이나마 갖추게 되었습니다.
77년 신학기 복학까지에는 3개월 정도의 시간이 있었으므로 그 동안에 학비조달을 염두에 두고
몇 군데 알아보았으나 여의치 못하였습니다.
기왕에 도전장을 마음 속으로 내놓은 터였기에 3개월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여 정식으로 77년 3
월의 19회 사법시험 1차에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뚜렷하게 사법시험 준비를 하는 학교 선배님이나 동료들이 거의 없었기에 별다른 얘기나 방법
론 등을 듣지 못하고, 책 선택도 합격기나 서점에서 많이 팔리는 책 위주로 하여 1차 전과목을 무
슨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겨우 1회독하고 시험장에 들어갔습니다.
막상 시험지를 받고 보니 확실한 답은 가려낼 수 업다 할지라도 알 듯한 단어들 이 눈에 많이 띄
어 소문처럼 어려운 시험은 아닌 듯 싶어 내년이면 1차 저옫는 가능할 것도 같아 가벼운 마음으
로 시험장을 나왔습니다.
 후에 시험성적을 알아보니 예상 외로 과락이 없어서 사법시험의 고지가 가깝게만 느껴졌습니
다.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그 뒤로 두 번이나 1차에 떨어졌습니다.
역시 자만은 금물인 모양입니다.

 77년 10월경 학교 측의 배려로 도서관 지하에 법학과 학생들마을 위한 조그만 방이 마련되었습
니다.
이곳에 한 자리를 얻어 제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5시 50분쯤 일어나 맨손체조 등을 하고 6시부터 7시까지 지금은 시간이 변경된 KBS라디오 영어
강좌를 들은 후 도시락 두 개를 싸들고 학교까지 걸어 가면 8시경, 점심먹고 1시간 정도 자고 저
녁 10시 30분경에 귀가하여 영어단어나 법전 조문을 조금본 후에 12시경에 자리에 누워 그 날
공부한 것을 미리 속에 그리다 보면 어느덧 잠에 빠지곤 했습니다.
 최대한의 시간 확보를 위해 하루 하루의 공부시간을 엄격하게 표시하였습니다.
별로 건강하지 못하던 몸이 었으나 이 때의 규칙적인 생활과 아침 저녁에 잠깐씩 하는 맨손체조
와 팔굽혀펴기, 30분 정도의 거리를 도보로 등,하교한 덕부에 오히려 건강해졌습니다.
또한 저녁에 자리에 누워 그 날 공부한 것을 머리에  떠올리가 보니 불면증으로 고생을 했던 기억
도 별로 없었습니다.

 78년 3월, 이번에는 기어코 붙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20회 1차에 응시했으나 영어에서 겨우 과
락을 면하는 낮은 점수와 80점이 너무 높은 커트라인으로 고배를 마셨습니다.
좌석에다 장담하는 구호까지 써놓은 터였기에 자신에 대한 실망과 함께 동료들을 대하기가 어색
했습니다.
77년 3월의 19회 응시로 1차에 대한 감을 잡았다는 것은 득이 되었으나 시건방지게 1차를 경시
한 탓으로 10월 말 시험공고가 날 때까지 느슨한 공부가 절대 패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번의 분패를 설욕한다는 계획으로 4학년 초에 1,2차
동시라는 터무니없는 설계를 했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그런대로 잡히는 듯하더니 얼마 지나고 나서는 2차 과목을 잡으면 머리에 잘 들
어오지 않아 불안했고, 1차를 잡으면 1,2차 동시라는 계획이 마음에 걸리고...
이럭저럭 하다보니 10월 말 또 시험공고가 났습니다.
그 때부터는 1차에 더 많은 투자를 하였으나 79년 3월, 21회의 결과는 또 한 번의 쓴잔을 저에
게 안겨주었습니다. 

 이제는 누구에게 말하기도 두려웠습니다. 제가 무엇을, 무슨 공부를 하는지도 알려 하지 않으
신 어머님이셨고, 공부에 관한 한 말씀 한 마디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러하신 어머님까지도 비록 무슨 시험인지는 잘 모르셨지만 이제 그만 했으면 하는 눈치를 보이
셨습니다.
학교에서도 제법 기대를 건다고 교수님들이나 학생들의 시선을 받아왔는데...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저 자신에 대한 회의가 엄습하였습니다.
이제 그만 물러서버릴까도 수없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투자해 놓은 것이야 아까울 것 없었습니다.
 원래 가진 것이 없는 놈이라서 잃은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제게는 아직 대학생활도 1년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
 1차부터 차근차근하게...
하늘을 보지않고 어떻게 별을 따겠는가.
1차에 합격하지 않고는 2차 시험장에 들어가 볼 수 조차 없지 않는가.
법학 전공에다 몇 번이나 도전했으면서 1차조차 못 붙고 그만 둔다면, 그리고 기회가 없다면 또
모르겠거니와 기회도 있는데 포기한다면 과연 앞으로 이룰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인생의 삶은 자기 자신이 사는 것이며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누가 대신 살아 주거나 남이 책임져 줄 성질의 것이 못된다.
 남이 어떻게 보든 기어코 하겠다.
한 인간의 삶의 [대차대조표]나 [손익계산서]는 죽을 때나 한번쓰는 것이지 어떤 순간마다 쓰는
것은 아닐 것이다.
처음에 중학교과정을 시작할 때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 약 8년이나 늦었는데 몇 년이 지난 오늘 날
은 비슷하게 되지 않았는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이 순간부터 다시 시작하자.

 이리하여 이번에는 1차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사실 법학과 학생이라면 1차와 2차를 구분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기본 3법은 1,2차 공통과목이고, 그 외 2차과목은 4학년 이전에 대부분 학교수업에서 다루어지
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2차는 의식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학기 동안에는 장학금이 걸려있었기에 시험기간 1주일 전부터는 학점과목을 하고, 여름방학에
는 비법률과목, 그 나머지 시간에는 기본 3법위주로 하였습니다.

 겨울 방학이 되면서부터 약 100여일을 3등분하여 1차 마무리에 들어갔습니다.
회독수는 중요시하지 않았습니다.
회독수를 남보다 적게 한것 같으면 불안하고 남과 같이 하고도 이해가 않 된 부분이 있거나 
남보다 떨어지면 자신의 실력에 회의를 가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전기간을 책의 두께와 재가 확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에 따라 적당히 배분하여 고루
고루 배정하였습니다.
 60여일 동안 영어는 매일 조금씩 하였으므로 이를 빼고 7과목을 적당히 배분하여 기본서를 1회
독하고, 곧바로 같은 과목의 문제점을 푸는 방법으로 1회독을 하고, 약 30여일 동안 기본서의 미
진한 부분을 보충하면서 다른 문제집을 한권씩 더풀었습니다.
그 후 약 10일 동안 매 과목당 하루 정도 배분하여 문제집 두 권에 표시되어 있는 틀린 문제와 중
요문제 위주로 전체적으로 살피고 마지막 시험 전 하루 이틀에 전과목을 두루 살핀 다음 곧 80년
3월 22회 사시 1차 시험장으로 향하였습니다.
 이미 2월에 대학을 졸업한 후였습니다. 운이 좋아서 전체 수석졸업의 영광은 안았으나 이것이
도리어 부담이 되었습니다.
명색이 수석 졸업생인데 1차마저 떨어지면 무슨 얼굴로 동문들을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막상 시험지를 받고 보니 경제학과 영어가 괴롭혔습니다.
영어는 10문제도 채 풀지 못했는데 학생들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고개를 숙인 탓으로 목은 아파오고 ...
 불안한 마음으로 취직과의 갈림길에서 책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던 중에 발표가 났습니다.
합격이었습니다.
참 오랫만에 들어보는 생소한 단어였습니다.
기뻤습니다. 2차는 준비하지 못하고 참가한 관계로 날 두 과목이 과락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년간 공부할 경제력이 문제였습니다.
여동생이 결혼한 후로 그 뒤를 이어 생활비를 담당했던 남동생이 4학년 말에 군대를 갔기에 이제
는 제가 나서야만 할 차례였습니다.
어머님의 삯일과 날품 팔이로는 한계에 와 있었습니다.
궁하면 통한다던가. 학생처장으로 계실적부터 장학금을 배려해 주신 박 길준 교수님의 소개와 법
학과 교수님들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재일교포 사업가로부터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고 후회스럽지 않을 1년을 보내겠습니다."

 장학금 덕분으로 2차 문제집과 참고서 등을 일괄 구입하였습니다.
이 무렵 고시잡지 4년분을 정성껏 모아 두었다가 아낌없이 건네 준 채 광기 형의 배려도 잊을 수
가 없습니다.

 5월 중순에 경기도 양평에 있는 보림사에 짐을 풀었습니다.
재학 중에도 방학 중에도 계속 학교 법률연구실을 이용했기에 학교도서실 외의 생활은 처음이었
습니다.
처음에는 좀 어색했으나 주위의 따뜻한 배려도 곧 익숙할 수 있었으며, 아침 6시 이전에 일어나
가벼운 조깅과 맨손체조를 한 후 책상에 앉으면서 오늘 하루도 성실히 보낼 것을 다짐하고 밤 12
시경 잘 때까지 빡빡한 계획으로 강행군을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에 한나절 정도는 쉬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친구들과 만나서 탁구를 치거나 가볍게 술을 마셨으나 이 곳에서는 냇가로 멱을
감으러 가거나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밤 깡소주를 마시며 물고기를 잡던 일,멱감으며 돼지고기 돌구이를
해먹던 일들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자제한다고 했으나 천성적으로 마음이 모질지 못하고 많이는 못 마셔도 술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날이 갈수록 시간확보가 줄어들었습니다.
후회스럽지 않을 1년을 보내겠다고 약속을 하지 않았던가.

 9월초, 정들었던 보림사를 뒤로 하고 10월에 신림고시원에 자리를 정했습니다.
기계적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머리에 남을 정도의 슬럽프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소위 슬럼프니 메너리즘이니 하는것은 불안과 초조에서 오며, 불안과 초조는 만조한 공부
를 못하는데서, 계획된 만족한 공부를 못하는 것은 자기의 정도를 넘는 무리에서 온다고 봅니
다.
경제력이 빠듯한데 어떤 형태로든지 무리하여 지출한다든가 하면 경제적으로 불안과 초조가 올
것이고, 체력이 한계가 있는데 너무 지나친 운동이나 음주 등으로 다음 날 영향을 미친다든가,
어떤 날 밤 공부가 잘 된다고 평소보다 밤 늦게까지 하여 그 다음날 영향을 미쳐 하루 양을 다 채
우지 못할 경우, 즉 하루를 만족스럽게 보내지 못했을 경우 불안과 초조가 오는 것 같고, 이것이
며칠 계속되다 보면 거기에서 헤어나오기 힘든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하루 하루를 무리하지 않고 규칙적으로 보내면서 몸에 피로가 오기 전에 일주일에 한나
절쯤 쉰다면 슬럼프니 메너리즘이니 하는 것도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닐 것 같습니다.
사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한 가지에 억세게 매어달리는 모양입니다.
검정고시 중학과정을 공부할 때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습니다.
 이 기간에 좋다고 자랑하던 시력이 뚝 떨어져 안경을 끼기 시작할 정도로 악착같았습니다.
이 순간은 저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9개월만 공부하겠다고 해놓고 대학까지 졸업했으면서 그것도 부족하여 공부를 하고 있었으니까
9년이 되었습니다.
꼭 붙어야만 했습니다.
 여러 편의 합격기에서 공부방법을 요약하여 나의 생활에 맞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6월 말까지는 2차 전과목을 목차 위주로 일별하였습니다.
7월부터는 각 과목마다 기본서를 읽고 참고서를 참고한 후 다시 기본서를 보는 방법으로 하여 예
정보다 늦은 11월 말까지 국민윤리와 헌법을 제와한 전과목을 1회독하였습니다.
2회독 이상의 효과는 충분했으리라 봅니다.
 이 때에 고시잡지 목차와 예상문제, 기출문제, 채택문제 등을 해당과목 해당부분에 전부 표시하
여 중요도를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중요한 문제가 여러 번 다루어졌을네니까. 12월부터는 국민윤리, 헌법, 행정법을 제외
하고는 문제집을 보면서 기본서의 자료를 모두 문제집에 옮겼습니다.
고시잡지의 중요 논문이나 모범답안 등도 참고 하였습니다.
 2월까지 그 작업을 마치고 2월 말경부터 국민윤리와 헌 법을 공부하였습니다.
3월 말부터 4월까지 다시 전과목 1회독을 하려 했으나 채 끝마치지도 못하고 마지막 4일을 맞았
습니다.
 "나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여 주소서!"

 하루에 2-3시간씩 자면서 최선을 다하려 하였습니다.
뚜렷하게 잘 치렀다는 과목은 하나도 없고 [민소법]과 [형소법]이 특히 마음에 걸렸습니다.
5월 8일, 어버이날이 마지막 시험날이었습니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 언제나 한결같이 성실한 자세로 진지하게 살아오신 어머님 가슴에 꽃아드리
기 위해 꽃 한 송이 를 샀습니다. 그
그날 저녁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시면서 이런 얘기르 했습니다.
사법시험 합격은 우선 장기간을 버틸 수 있는 체력, 수험기간 동안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재력, 꾸
준히 닦은 학과실력, 시험을 얼마 앞두고 극도의 불안과 초조, 긴장 속에서 이를 극복하고 자기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 절대자에 대한 신앙이나 정신력 등등이 합쳐져 이루어지는 하나의 작품
같다고...
 
어머님의 눈물
 
 시험이 끝나던 날 밤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불합격이 된 꿈을 꾸고 불안과 초조 속에서도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발표 하루 전이었습니다.
미리 연락주겠다던 친구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역시 떨어졌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동안 나름대로 마음의 정리르 해오던 터라 조금쯤은 담담했습니다.
6월의 중순이었지만 제겐 연말의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짓고 새해를 맞이하듯 이제까지 있었던 나의 지난 날을 결산하고 어떤 직장이든
취직해서 새생활을 시작하는 것으로...
 
 저는 취직하기로 마음먹고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를 신청하였습니다.
발표가 있을 그 날 아침 어머님께 합격하지 못했음을 알려드렸습니다.
  
 "내 정성이 부족한 모양이구나, 남들은 절에 공들도 드리고 한다든데 그짓 한번 못했으니..." 

 그 순간에도 어머님은 못난 자식을 탓하시기 보다는 당신의 정성 부족을 후회하셨습니다.
그 눈가에 물기가 감돌자 말 끝을 흐리셨습니다.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집을 나왔습니다. 교외선을 탈까 생각하다가 졸업증명서 등을 찾으
러 학교에 갔습니다.
잠깐 들른 법경대 조교실에서 "2차시험 사정위원으로 들어가셨다가 나오시는 교수님으로부터 연
락을 받았습니다.
합격! 합격을 했답니다."하였습니다.

 시험은 학생이 보지만 체점은 교수님이 하신다든가. 나중에 알아보니 과락을 걱정했던 과목이
오히려 평균점수를 넘었습니다.
역시 중도 포기는 금물인 모양입니다.
믿어지지가 않아서 총무처와 고시연구사로 확인 전화를 하고 나서야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어머님, 감사합니다." 어머님과 저는 부둥켜 안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네가 내 한을 풀어주었구나.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처음이었습니다. 어머님의 눈물은...
 

새로운 출발점에 서서
 

  축전과 전화도 뜸해진 지금 조용히 지난날들을 반추해 보며 내일을 생각해봅니다.
뭔가 제가 원하던 것을 이루었다는 성취감을 맛보았다는 이외에 특별히 합격했다는 실감이 나지
는 않습니다.
시험을 준비할 때는 합격 이외에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나 막상 합격이 되고 장차
 
법조인이 된다 생각하니 막중한 임무에 두려움이 앞섭니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소신 있고 정(情)이 있는 판결을 할 수 있을까.
남보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좀 더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겠다는 나의 마음에 위선
은 없는가.
얄팍한 동정심 따위는 아닐까.
그동안 이 사회와 여러분께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는 도움을 만에 하나라도 환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제게 지금 필요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라는 것을 압니다.
제겐 지금부터 참 용기와 슬기가 필요하며 그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항상 시작하는 마음으
로 저를 성원하여 주셨고 앞으로도 성원하여 주실 여러분들의 기대에 보답할 것을 다짐합니다.
 
  끝으로 저의 이런 이야기들이 보는 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비칠 것으로 보나 저에게는 남다른
특이한 성격이나 환경이 주어진 것이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흔히 겪을 수 있는 과
정이며,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 걷겠다고 저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 내가 태어난 고향, 조국 등은 선택할 수 없어도 그 밖에 많은 것들은 자신의
마음 여하에 따라 선택할 수 있으며, 항상 자기에게 주어진 여건과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를 최선
을 다할 때 어떠한 형태로든 보답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사실 저는 보시다시피 저의 의지나 노력보다는 주위환경의 변화나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오늘
이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감사를 드려야 할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모교의 총장님을 비롯한 교수님, 교직원선생님들께 감사드리고, 항상 친가족처럼 대해 주시며
격려를 주셨던 박길준 교수님, 김욱곤 교수님, 임종율 교수님, 양 건 교수님과 법학과 교수님들,
 
민소법의 강현중 판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려울 적마다 학비를 보태주신 조명준 선생님, 로타리문화장학재단 이병창 사장님, 제가 중고
등학교 과정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검정고시 과정의 고려학원 문상주 원장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드리고 특히 마음으로부터 정성을 모아 기념패와 기념선물을 마련 전달하여 주
었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밝은 내일을 설계하며 검정고시 과정을 공부하는 고려학
원 학생들께 감사의 마음과 함께 그 정성 길이길이 마음속에 새길 것을 다짐합니다.
 
 또한 저를 알게 모르게 성원해주신 여러분과 항상 격려를 아끼지 않고 어려운 일을 해주었던 모
교의 법학과, 검정고시동문회, 법률연구원, 행정연구실 실원들과 친우들께 감사하며 지금 이 순
간에도 이 길을 가시는 여러분들의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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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