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의 역사는 어느 부류에 속해야 될까? 역사적으로 기술 하지만 경제학자의 열정적인 패러다임이 들어있다. 경제학자의 열정이 역사의 진보와 마찰을 통해 그려진다. 단편적으로 경제학사는 경제학에 속할지와 역사학에 속할지의 문제는 경제학이 역사에 걸쳐 발전하는 것과 같은 구조를 가졌다.예를 들면 경제학의 역사의 학문 분류는 수량경제학은 통계학과 경제학의 양학의 분과학문과 같다는 이야기다. 무엇이 '기'이고 무엇이 '본'인지 모를 정도로 지금의 분과학문은 다양한 학문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게된 큰 이유는 최근에 나의 삶의 방향을 설정해준 마음의 멘토 두명 때문이다. 그들은 '장하준','미네르바'이다. 작년 8월달 쯤 지우가 빌려준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읽었었다.아마 기존의 경제학의 틀을 깻다는 것이 그 책의 첫인상이었다. 그리고 어떤 분야에 통달되어있다면 어린 아이까지 그 학문의 이치를 깨닫게 할 수 있어야 된다. 이 책을 덮으면서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책에는 아무런 경제학적 수식이 나열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오직 구술적,언술적인 풀이로 그가 보는 경제학적 시각에서의 세상이 그대로 그려져있다는 것에서 무릎을 쳐졌다.
그리고 과거가 되어버린 지혜의신,미네르바 또한 그의 글 모음에서 경제학이든 금융이든 어떠한 페러다임을 메커니즘 형태로 볼 수 있어야 함을 지적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두껍고 빨간 경제학의 역사'라는 책을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두껍고 빨간 책을 내 손에 쥐고 한달을 씨름했다. 그러나 아래에 적는 독서기록이라는 놈은 나의 아량한 지식과 경험을 통해 아전인수격으로 적어 놓은 작은 낙서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걱정하는 바다.
-필자는 이러한 의문에서 자신의 저서를 썻을 것이다. 현대에는 경제학을 소위 사회학의 여왕으로 불린다. 이러한 이유는 사람이 생성하는 현상 즉, 사회현상을 가지고 자연과학적인 접근으로 '과학성'을 불어 넣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그러한 연유로 애덤 스미스의 저서는 경제학도가 느끼기엔 이집트의 상형문자처럼 오래되고 낡아버린 것이 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첨단 경제학은 5~10년 전에 씌어진 글조차 감가상각에 의해 가치가 0이 되어버렷다. 물론 경제학의 과학화는 진정한 경제학도의 관념을 다른 이들에게 증명해보이고 실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엄청난 발전이라고는 반론할 여지가 없다. 다만, 미래의 애덤 스미스,미래의 케인즈가 이러한 수식과 과학화의 해개모니에 의해 태어나지 않을까 다소 염려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주석과 플로우 챠트를 그리는 법을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이 책 또한 저자의 경제학의 헤게모니를 부수기 위한 의도였었다.그러나 나는 경제학의 역사를 보면서 경제학의 헤게모니를 오히려 체험할 수 있었다.
프롤로그에서 이 책이 말하는 모든 것이 언술되어있다.
경제학의 역사는 어떤 것이 포함될까?,경제학이란 무엇인가?,경제학의 역사는 시간적 괴리-현재에서 망원경으로 과거를 보기 때문에-가 생긴다, 경제학이 어떻게 현재 상태에 도달했는가? 이러한 근원적인 물음으로 독자를 유혹한다. 특히나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는 그 때 당시의 도덕철학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경제학적인 사유를 할 수 있었던 역사적 상황과 학문적 융합과정을 그려냈다는 것을 맛보기로 보여준다.
1장 고대 세계
어떤 공부를 하더라도, 학문의 본류(本流)가 있다. 경제학의 학문에서 시초가 되는 고서는 플라톤은 호메로스가 그리스인들을 가르쳤으며 그의 서사시들은 인생의 지침이 될 가치를 가치를 주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호메로스라는 고대(古大)작가가 지은 일리아스(ilias)와 오디세이아(Odysseia)에는 이미 선물의 교환(Gift exchange)과 같은 과거의 문화적 관습을 그린다. 그리고 지주와 토지, 노동이라는 경제학의 토대가 되는 정보도 기록되어있다. 또한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보면서 오래전에 이미 경제학적인 관념을 통한 생각은 발전되어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가지 유형의 정의로 교환과 상품의 분배를 다뤘다. '첫째, 분배적 정의는 각자의 공적에 비례에 분배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그가 살았던 전쟁의 전리품과 과두제로 인해 생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그러나 그는 이미 몇천년 후의 생각을 해냇다는 것에 감탄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두가지 정의를 더 말한다. 둘째는 교정적 정의다. 손해를 본 사람들에게 보상해줌으로써 이전의 부정의(injustice)를 교정한다는 것이다. 교정적 정의는 균등성(equality)을 회복한다. 마지막으로 호혜적 정의(reciprocal justice)또는 교환(exchange)에서의 정의다. 나는 이러한 문구를 보면서 이 시대를 사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부끄러움을 느꼇다. 아주 오래된 과거의 생각과 패러다임이 훨씬 더 풍족해진 민주주의 사회,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루어 지지 않다는 것을 보고 한 사람의 작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다시 민주주의의 대한 회의가 시작되었다. 자본주의의 진정한 성찰을 하고 사는 자들이 몇명인지? 어렴풋이 시골의사나 미네르바와 같은 조용한 고수들의 커다란 부르짖음이 책을 보면서 느껴졌다.
고대 그리스 세계는 물론 로마도 아주 먼 과거로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뿌리들은 아직도 아니 최소한 20세기 까지 많은 경제학자들의 생각의 소스를 제공했다고 사료된다.
2.중세
역사적으로도 로마의 1000년 제국 붕괴가 고대와 중세를 갈라놓는 배경이 된다. 그러나 제국이 몰락하면서 시대적 발전은 붙들고 몰락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에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경제적,사회적,정치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중세에는 핵심이 되는 것은 인간과 화폐이다. 로마의 쇠망기에는 야만족과 역병으로 인해 금의 공급이 줄어든다.
그러나 제국과 사람은 돈이 필요 했다. 그래서 화폐의 공급과 금의 공급의 괴리가 생겨난다. 그 때에도 확장 정책을 사용했다. 그것은 금의 순도를 떨어뜨려 많은 화폐를 주조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과거에도 인플레이션(inflation)이 오랜기간동안 발생했다. 그로인해 커다란 도시가 쇠퇴했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에 유대 주의를 알아야 해석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회의 경제적 사고가 유대주의 뿌리를 두고 있다. 그로 인해 '상행위의 의심','부채에 대한 관용'이 모토가 되어 부채에 대한 이자는 없었고 상행위는 이윤을 남기는 행위가 아니였다. 그래서 고리대업자 뿐아니라 단순한 화폐 대부자,크고 작은 장사꾼들 까지 정의롭지 못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여겨 졌다. 그러나 부의 획득 자체는 죄가 아니였다. 다만 부의 추구방법에서 선악이 구별되었다.
나는 이것을보고 인간이 악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품은 제도가 악하므로 인간이 악하게 행동 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란 궁금증이 떠올랏다. 다시말해 과거의 이윤을 남기지 않는 상행위나 이자없는 화폐 대부자들이 활동하는 시대에서는 오히려 좀더 선행이 고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부채로 인해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라 부채가 만드는 이자라는 개체때문에 더러워지고 인간이 악하게 행동할 수 밖에 없는 근인(根因)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대교와 반대되는 이슬람에서는 대부(貸附,loans)에 대한 이자를 취하는 것이 금지되었다.상속은 규제되었으며 그에 따라 토지는 한명의 피상속자에게 유증(遺贈)되기 보다는 분할 되어야 했다.즉 아리스토텔레스는 화폐의 세가지 기능,교환의 수단,가치 측정의 수단,미래의 교환을 위한 가치의 축장 수단을 인식했다. 이것에 더하여 이븐 루슈드는 구매력의 저장소라는 기능을 추가 했다. 그래서 이슬람문화에서는 화폐를 모든 것을 측정하는데 사용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모든 것의 척도인 알라 신과 마찬가지로 화폐도 불변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즉, 부채의 이자따위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가치가 하락하는 것은 매일 자의 눈금이 변하는 것은 불공정을 야기한다는 것이 그들의 교리이다. 그러나 이슬람도 성실한 확장을 배척하지 않았다."정부 지출은 노동자가 산출한 결과값과 비례하여 팽창할 수 있다"라는 코멘트는 지속적으로 이뤄진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유럽(서구문명)에선 흑사병과 소르네상스를 거치면서 화폐에 대한 생각이 변화한다. 과거에 상행위와 대부이자취득에 대해 회의적이 었던 태도는 사회가 상업화 돠면서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13세기 기욤은 사유재산에 대한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그 결과 공리를 도출한다. 재산은 필요악이다. 왜냐하면 재산을 가진 사람은 재산이 없는 사람과 그것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 유사한 맥락에서 그는 대부를 필요로 하는 차입자의 급한 사정에서 연유할 수도 있는 대부자의 우월한 교섭력을 포함한 강제의 사용이 계약을 무효화 한다고 주장했다.
쉽게 말해 강제적으로 돈을 빌리고 이자를 갚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가면서 한사람의 잉여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제공되거나 구매와 판매를 공유되어야 하는 전제로의 개인의 사유재산 축재를 용인해주는 공리가 생겨났다. 즉, 부는 남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사회에선 스스로를 남으로 생각하여 스스로를 돕기위한 부가 생겨나는 현상이 발생한다. 쉽게말해 돈이 돈을 버는 것이다.
그리고 재화가 교환을 위해 사용될 경우 구매와 판매는 정당한 가격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교환적 정의의 논의가 행해진다. 스콜라 주의자들은 "무언가가 사기 행위 없이 판매 될 수 있는 한 그것은 가치있다"라는 로마법 사상을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나의 소견은 Q)대다수는 이번 교환이 사기가 아니라 생각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판매가 사기라고 한다면 이러한 교환은 정의로울까? 이러한 가치 판단의 물음은 이 책을 덮는 순간까지 따라다녔다. 간단히 말해 한 사람이라도 판매가 사기라고 한다면 아는 자는 거래를 하지 않고 다수는 거래를 행하여 이후에 시간이 판단해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즉, 현재 투자자산을 거래할 때 매도/매수의 거래 자체는 선악이 없고,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하지 않는 당사자의 책임과 이후의 상대 거래자의 피해는 금전적으로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세시대에도 고리대에 관한 근본적인 생각은 변화가 없다.
왜냐하면 화폐자체는 불임적(不姙的)이라는 것이다. 돈이 늘어나는 것은 노동과 차입자의 노력때문이지 돈 자체가 자기재생산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돈을 빌려서 돈을 벌었다면 이러한 돈은 돈이 생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차입자의 노력이 가미되어서 돈을 벌었다는 공리가 중세시대에는 받아들여졌다.
3. 16세기,근대적 세계관의 출현
르네상스와 근대 과학의 출현로 종교,과학,미신이 공존했던 것이 한순간에 없어진 것은 아니다. 엄청난 시간적 여정으로 마찰되고 마모되는 것으로 불확실한 것이 확실해진 것이었다. 그중에 종교와 과학의 분과에서 첫 발을 내디딘 사람은 코페르니쿠스였다. 그는 현실과 이론의 다이버전스를 극복하는 행위를 실행했다. 달력의 한 해는 태양력의 한해와 길이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절들이 달령상의 전통적인 자리를 벗어나는 점을 기인해 그는 천체를 탐구했다. 이러한 유형은 신플라톤주의적인 탐구였다. 이러한 영감은 16세기 동안 계속해서 이뤄졌다. 그리고 종교 개혁에서도 종교와 현실의 괴리를 매꾸려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분리되면서 종교개혁이 시발점이 되었다. 즉, 개인적인 소명의 증명은 자신이 올바른 부를 축적하므로서 증명할 수 있다는 프로테스탄트 사상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급속히 보급된다.
이 시기에 토머스 스미스는 “쟁기를 끄는 농부의 이윤율이 목축업자 및 목양(牧羊)농장 경영자의 이윤율 만큼 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반대작용을 할 수 있는 모든 법률에도 불구하고 목초지가 농지를 잠식해 들어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목양업의 확장을 저지하는 방법은 목양업에 반하는 입법이 아니라 목양업의 수익성을 떨어트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모 수출의 수익성을 엄청나게 높힌 관세장벽을 철폐해야 했다. 마치 현재의 농업<->전자산업<->2차전지산업 의 관계를 구술한것과 같다. 입법과 같은 정부의 계획에 의해 불균등이 오히려 가속화 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했다는 것에 감탄했다. 또한 스미스는 무역수지(balance of trade)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이러한 것이 중상주의적인 것으로 규정될 수 있는 슬로건이었다.
16세기는 스콜라주의와 새로운 중상주의 학파의 충돌이었다. 이윤 추구의 행위를 당연시하기 시작하면서 그러한 행위의 의미가 무엇인지 밝혀 낼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과거의 이윤의 도덕성을 논박했던 시절과 괴리가 있음을 알 수도 있다. 이러한 역사적 동인은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정치술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밝혀내려 한 마키아 벨리의 시도 또한 이러한 변화과정의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4. 17세기 영국의 과학,정치,무역
17세기는 사고와 철학이 열정적으로 다뤄져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베이컨과 데카르트는 모두 전통적인 권위에 도전했으며 스스로를 지키는 툴을 제시했다. 베이컨은 귀납법(induction)을, 데카르트는 연역법(deduction)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들이 제시한 방법은 달랐다. 그러나 유사성도 있었다. 데카르트는 세계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 포괄적인 관점이란 세계를 단일한 유기체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관점은 이 부분이 움직이고 상호 작용하는 방식의 측면에서, 즉 하나의 기계적인 체계로서 이해되어야 했다. 베이컨의 프로그램은 왕립학회(Royal Society)에 의해 채택 되었다. 그때의 왕립학회의 모토는 “누구의 말도 믿지 말지어다(Nullius in verba)”였고 권위에 의거한 논증을 거부한 베이컨의 사상과 일치하는 방향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베이컨의 접근법은 정치산술이라는 퍼티의 저작을 남겼다. 이것은 17세기 영국의 GNP를 나타낸 체계적인 저작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인구와 토지,그리고 자본의 체계적인 관계를 간파하여 대략적인 국민소득회계를 이룬 것이었다. 또한 일인당 가치를 80파운드까지 도출 한 것을 보았을 때 그 당시 페티의 연구가 상당한 의미를 지녓을 것으로 보인다. 페티는<현자는 한마디로 족하다verbum sapienti,1665>에서 소득의 분배와, 한해의 노동일수(287),노동하는 인구의 비율(50퍼센트)등 에 관한 전제들로부터 연평균 지출수치를 얻어 냇다. 국민소득회계는 간단한 것이었지만, 그 당시 커다란 개념적 진전이 관련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비약이 없을 정도로만 정확한 규모를 정하는 작업을 행했다는 것에서 약간의 비판이 상존한다. 나의 생각이지만 현재의 아고라가 기존 정부의 권위를 반기하는 미래 역사에서 왕립확회가 아닐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17세기의 다양한 해결 도구를 발명한 많은 철학자들을 보면서 느꼇다. 미래의 문제를 풀 수 있는 해결의 실마리를 내어주는 것이 현재 살아가는 자가 행하는 소명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 또한 미래의 투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자철학을 모색하는 것이 소명이라고 느끼고, 그 속에서 나의 투자철학을 믿고 맡겨줄 고객과 함께 밝은 미래로 나아가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새삼 스럽게 깨닫았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서 나는 지극히 경제적이지도 지극히 정치적이지도 않아야 된다는 것을 느꼇다. 단지 나는 내가 공부하는 분야는 경제면서 금융인 곳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리고 경제학의 역사는 미래를 조금이라도 많이, 깊이 계산하고 사고하는 자가 학문의 역사였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와서, 무역 차액론이라는 토론이 정부관료였던 제라드 멀린스(Gerard Malynes)에서 나타난다. 그는 낮은 환율이 국부에 도움이 되고 장기적으로 자국의 경제성장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영국 통화의 가격 하락으로 액면가 이하가 되면 은을 보증하는 내재가치 이하만큼 떨어진다면 다른 나라의 무역은 영국의 화폐를 원하게 될 것이고 수요가 증가하여 화폐는 부족하더라도 부가 증가 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17세기 영국의 경제학을 종합하면 16세기에 대두되었던 ‘중상주의’의 확장이라고 해도 알 수있다. 그래서 무역차액론을 낳았고 먼의[외국 무역으로 벌어들인 영국의 부]는 후에 애덤 스미스가 중상주의적 사고의 대표라고 공격했던 책을 낳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경제사상에 대해 이렇게 단순하게 특징짓는 것은 지독한 오해라는 점은 분명하다.
17세기 동안 영국은 수많은 경제 문제를 경험했고, 이 문제들로 자극을 받은 다양한 이해집단에서 많은 욕구의 대채물로 여러 정책을 옹호 했다.각자의 이해에 맞는 이론들을 옹호하고 비판하면서 다음 세기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5. 18세기 프랑스에서의 절대주의와 계몽주의
캉티용은 가격-정화(正貨)-흐름 메커니즘(price-specie-flow mechanism)이라고 불리는 것을 인식했다. 통화량 증가가 사격 상승을 야기하고 이는 다시 화폐의 국외유출과 무역적자를 유발한다는 개념이었다. 이것은 기존의 멀린스의 주장을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즉, 통화량 증가 시키려는 시도는 자멸이라는 공식을 함축한다. 그리고 캉티용은 금융에서의 지급 불능 사태의 위험을 지적한다. 즉, 급작스런 은행권 요구 사태(BankRun)는 은행권지급불능상태(Bankrupt)상태에 빠진다는 것을 지적했다. 금은을 맡겨둔 자들이 갑작스럽게 금은을 찾으려는 사태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진척이 있다는 반증이다.
6. 18세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뛰어난 역사가인 애덤 퍼거슨(Adam Ferguson,1723~1816)은 “현단계는 이전 시대가 시작한 것을 완성하고 있거나 또는 미래 시대가 완성할 일을 시작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신기했던 부분은 내가 고민하고 논증했던 명제들은 대부분 이후의 세기에 즉 쫌 더 가까운 과거에 논의되어 해결되었던 것을 보고 놀랬다. 로버트L.하일브로너의 [세속의 철학자]들에서 말하는 현재 숨쉴 때 마다 과거의 세속철학자들의 고뇌를 우리가 되짚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데이비드(David Hume,1711~1776)은 그의 철학적 저작으로 가장 유명하지만,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그의 [영국사](History of England, 1754~1762) 때문에 역사가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경제학에 관한 그의 접근법도 역사적 관점으로 가득차있다. 그는 독자들에게 단지 그의 생각이‘통상적인 경로에서 벗어나’있다는 이유로 자신이 말하는 것에 반대하는 편견을 갖지 말라고 호소했다. 공적인 선은 몇몇 개인의 변덕이나 우연이 아니라 여러 복합적인 원인에 의존한다고 흄은 주장했다. 이것은 누군가가 가령 대외정책을 해명하기 위해 제시할 수도 있는 역사적인 유형의 설명이 이 주제에서 부적절하다는 것과, 친숙하지 않은 결론을 낳을 수 있지만 좀더 일반화된 추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했다.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 당시의 흄 또한 다소 반체제적이고 소수파의 의견을 따랏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실증주의자다 이러한 규정 없이도 그의 저작의 단편만 보더라도 그 시대의 쓴소리를 했던 직설가였을 것으로 상상된다. 그는 현실을 치환적으로 봤던 것으로 사료된다. 제조업이 가치있는 것은 그것이 노동을 저장하여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통념은 노동으로 물건을 생산하는 제조업의 역할을 뒤집는 새로운 관점이었다. 또한 그의 화폐의 정의가 매우 참신하다. 화폐란 “바퀴(교역)의 움직임을 더 부드럽고 쉽게 해주는 기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화폐가 많은 예외는 금과 은이 풍부하다는 것 외에는 편익이 존재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최초의 경제학의 분과된 것은 제임스 스튜어트가 Political Economy(정치경제)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부터였다. 스튜어트는 농업이 상업을 이끈다라는 것이다. Q)농업이 상업을 이끈다.그렇다면 농업이 금융을 이끈다는 논리는 맞을까? 그는 농업이 흥하면 인구가 상승하고 그러한 이유로 상업이 흥 할수 있다는 논리다. 인구가 증가하면 금융이 흥하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그의 지론은 어느정도 타당성을 지녔다. 그리고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나온다. 그는 원래 수사학과 문학,법학과 도덕철학을 강의했다. 경제학에 관한 그의 저작은 이것으로부터 탄생했으며 사회과학에 관한 좀더 폭넓은 연구의 일환이었다.
7. 고전파 정치경제학,1790~1870
이제는 도덕 철학에서 정치 경제학으로 발생한다. 그로인해 영국 국교회 성직자였던 멜서스는 인구론의 주장이 등장한다.이유는 그 당시 유행했던 유토피아적 관점에 반대하는 주장으로 인구론이 발생했다. 인구의 기하급수 변화와 식량의 산술급수적 증가의 제어 유무를 판단하는 것이 그의 내용이었다. 그중에서 두가지 유형의 억지력은 인구의 멸망으로부터 막아준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비참(전쟁과 기근)과 악덕(유아살해,매춘,피임)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이러한 두가지 억지력으로 인해 인류각 종말에 다다르지 않았다고 밖에 설명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비약은 인정할 수 밖에 없지만 그가 보여준 진보의 가능성을 열어준 가치는 그의 오류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벤담의 공리주의 해석으로 새로운 몇가지 가치판단이 등장했다. ①사회의 이해는 사회 구성원들의 이해의 합계다.②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이해를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다.③모든행복 용량은 서로 동일하다. 이것은 평등주의적이고도 개인주의적인 철학을 낳았다.
지대의 연구로 대표되는 리카도는 수량 경제를 도입한 인물로 나타 난다. 인구의 증감에 따라 생계임금률보다 상승하거나 하락 할 때, 지주와 자본가가 돌아가는 이윤의 관계는 그 당시에 천재적인 발상이라고 본다. 또한 당연한 공리전제를 발견했다. 임금은 최소한 한동안은 생계비 수준 이하로 떨어질 수 없으며, 따라서 삭감될 수 없다.라는 것은 이러한 명칭의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리카도의 모델은 커다란 이론적 문제를 야기했다. 두 상품이 있다. 농상품과 공산품이 있다면 그 상대 가격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는 도동가치론에 의해 농산물과 같은 상당한 노동과 시간이 걸리는 재화에 대한 내재가치를 높게 매길 것이다. 그의 노동가치론으로는 시장의 가격 설정을 설명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차익 거래자에 대한 소고를 하게 되었다. 현실세계에선 아직도 차익 거래자들의 사업이 생계를 떠받들고 오히려 이러한 업종이 블루오션이고 미래에 내가 나아가야 할 곳이라고 생각이 떠올랏다. 리카도는 스미스의 생각을 받아들여 저축과 분업을 경제에 유익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화폐에서는 은행권은 그대로 엄격한 중금주의(重金主義,Bullionism)적인 입장이었다. 은행권 발행과 금괴의 가격 사이에 관계는 끓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중금주의가 끓어졌다. 그렇다면 진짜 화폐의 신용은 있을까? 라는 질문이 나온다. 현대 화폐의 신용은 그것을 가지고 돈을 벌 수 있는 수익률만이 화폐의 가치를 보증해준다. 만약 그 돈을 써버린다면 그것은 화폐의 보증을 포기한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리카도의 경제학에 근거했던 19세기 중반에 카를 마를크스(Karl Marx,1818~1883)이 있었다. 밀이 스미스와 리카도에 의해 마련된 고전적 틀 안에 머물렀다면 그는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에 대해 급진적으로 비판하려고 했다. 그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0)사상에 지배적인 영향을 받았다. 여기서 새로운 해결 도구가 나온다. 그것은 변증법(Dialectics)이다. 이것에 따르면, 사상은 테제와 안티테제의 대립 및 이 대립으로부터의 진테제의 출현을 통해 진보한다. 그러나 헤겔식 변증법이 사상의 영역에 적용된 것이었다면, 마르크스는 물질세계와 사회의 진화에 대한 변증법적 분석을 시도했다(역사적 유물론). 그가 해석한 세상은 역사의 각 단계에는 긴장이 발생되며, 이 긴장의 결과 새롭고 더 높은 단계의 사회로 이행하게 된다. Q) 우리사회도 이러한 의미에서 발전해왔고 지금은 금융자본주의로 대변되는 패러다임에 위치해있다. 이러한 금융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은 빚을 써야 돈을 벌 수 있고 빚은 부채로서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빚을 갚지 않으면 낙오자가 발생하여 사회와 마찰이 일어난다. 그러한 마찰과 갈등속에서 세상은 발전한다는 논리는 과연 합당한 것인가? 나는 이러한 채무불이행자들은 해마다 화폐가 실제 가치보다 자기 증식을 더한 차이 만큼 증가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결국은 고삐 풀린 화폐가 발생하면 상당한 수의 채무불이행자가 등장하며 금융자본주의,후반 자본주의의 붕괴가 기정사실화 된다. 그리고 다음 기술집약적이고 자원중심적인 사회가 올 것이라는 사고를 도출했다. 그리고 그는 노동과 노동력의 차이로 인해 노동자들이 착취당한다고 주장한다. 노동력의 가치는 6시간이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10시간을 일할 수 있다. 그것이 노동이다. 노동과 노동력의 차이를 뺀 차액을 취하는 것은 자본가들이고 이러한 잉여가치를 착취할 수 있는 것은 생산수단을 사유-사적으로 점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착취가 자본주의 체계의 원동력이라고 그는 꼬집어 말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체계에서는 자본은 단순한 돈이 아니였다. Money-Commodity-More Money가 되는 M-C-M'구조가 요약된다. 그로 인해 자본을 굴려 재화를 만들었다가 다시 더많은 돈을 생성하게 된다. 또한 자기 재생산(Self Reproduciton)인데, 여기서는 자본이 증식한다. 자본지 축적되는 것은 자본가가 화폐를 축장(save)하기 때문이 아니라 화폐를 사용하여 노동을 생산적으로 고용하기 때문이라는 스미스의 의견을 동의했다. 자본주의가 붕괴할 수 있는 원인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집적(concentration)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성실한 노동력을 사용 가능한 노동수단으로 전화시키고 그들에게 착취를 하여 자본을 독점하는 자들은 점점 소수가 되어간다. 그로 인해 다수의 노동자들에게 체제 교환권을 내어준다는 것이 그의 내용이다.
8. 유럽에서 역사와 이론의 분리
경제학은 전문화 되고 제번스,발라 그리고 수리 경제학이 등장한다.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이 국가 단위의 당파를 조직하여 세계 경제학의 흐름을 흔든다. 그 중 카를 맹거(Carl Mener, 1840~1921)는 경제활동의 목적이 인간 욕구(human needs)의 충족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재화란 다음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었다.1. 인간 욕구 2. 사물로 하여금 이 욕구의 충족과 인과적으로 연관될 수 있도록 만드는 그러한 성질 3. 이 인과적 연관에 대한 인간의 지식 4. 그것을 욕구 충족 쪽으로 방향 짓기에 충분한 사물에 대한 지배 등이 없으면 재화가 될 수 없다는 범주를 확립했다. 그리고 영국의 역사학파 경제학과 마셜 학파가 등장한다.마셜 경제학은 수요 및 공급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그리고 유럽의 경제 이론은 한계주의 경제학의 뿌리를 두었다. 그래서 팔레토의 일반 균형론을 발전하고 세련화 시켰다. 그리고 수학, 특히 미분이 점점 더 많이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경제학은 장기 독학에 관한 고전전적인 관심 대신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실험에 대한 관심이 자리를 대신 차지 하였다.
9. 미국 경제학의 출현 1870~1939
19세기 말의 미국 경제학은 존 베이츠 클라크와 수리경제학에 초점이 맞춰졌다. 수리 경제학은 경제학자들의 한계주의를 수학화로 논증하면서부터 확장 되었다. 뉴컴의 화폐수량설은 수확적 정식화에 기여를 했다. 그의 항등식 V*R=K*P였다. 특정한 시기에 유통되는 화폐의 양R를 그 유통속도(각 달러가 평균적으로 거래에 사용되는 회수)V와 곱하면, 수행되는 사업의 양K와 가격수준 P를 곱한 것과 동일하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의 주된 관심은 천문학이었으므로 수학적 방법의 열렬한 지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886년경 이후에는 자신의 경제사상을 발전시키거나 경제학에 관한 출판물을 발표하지 않았다. 전간기 다원주의로 인해 다양하고 신선한 접근과 실험이 이뤄졌다. 그리고 유럽 학자들은 1914~1945동안의 정치적 혼란 기간에 미국으로 이주해왔으며 유럽의 경제학문의 뿌리를 미대륙에 일부분 이양했다고 볼 수 있다.
10. 화폐와 경기 순환
빅셀의 누적과정과 변화한 경제환경으로 인해 경제 전반적인 관심이 높아졌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와 스웨덴의 경기 순환이론은 이러한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영국은 마셜에서 시작한 경제학의 확장기가 케인스 까지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케인즈의 코멘트가 있다. 통화량을 배로 늘리면 가격 수준이 배로 상승할 것이라는 관념을 가르키며 케인즈는 ‘자,’장기적으로는‘ 이것이 아마도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장기적이라는 것은 현재의 사태에 대한 지침 주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폭풍우의 계절에 폭풍이 지나고 한참이 흐르면 대양은 다시 잠잠해진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면, 경제학자들은 너무나 쉽고 너무나 쓸모 없는 과업에 몰두하는 것이다’ 지금 금융장세에 들어선 주식시장에서 비관론자와 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 사이의 무기력증을 표현해도 적확하다고 생각하는 멘트이다. 그리고 케인즈는 불확실성 소위 리스크에 대한 직면에 대한 행동요령도 설명한다. 투자는 미래 수익에 대한 합리적인 계산이 아니라 신뢰의 상태에 의존 할 것이다. 특히 “어떤 변화를 예상할 수 있는 특정한 이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사태의 기존 상태가 영구히 계속 될 것”이라는 통념에 의존해야 된다. 아마도 케인즈가 살아온 생애는 그 동안에서 케인즈 혁명이 가시적으로 관찰 되었을 것이다. 이전의 다양하고 신선한 접근법을 침묵하게 하는 케인즈로 인해 전간기로부터 전후 거시경제학(After War Macro Economics)으로 이행되었다.
11. 계량 경제학과 수리 경제학은
현재의 사용하는 경제라고 하는 사회과학의 여왕 자태에서 겉모습은 모두 수학이라는 실크로 덮혀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연역적 및 귀납적 논증에서 수학이 사용된 이러한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이후의 경제학의 수학화는 경제학에서 이루어진 거대한 새로운 발전을 나타낸다. 그 이유는 그것이 경제학이 사고되는 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 했기 때문이다. 경제학은 일련의 현실 세계 문제들이 아니라 일련의 기법들을 중심으로 구축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소득회계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혁명적이었다. 왜냐하면 1920년대에는 어떤 나라에도 포괄적인 국민소득회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GDP,GNP,GNI로 대표되는 이러한 통계지수가 전혀 관측 되지도 발표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수리 경제학이 일반균형이론을 만든다. 각 수준의 복지가 나타나는 무차별 곡선에서 소비자가 도달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지수준을 만들어 낸다는 이념이었다. 한정된 자원에 대한 최적의 효용이라는 모토가 설정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가지 의문점이 있다. 수학은 자연 학문이고 경제는 사람이 말하는 사회 현상이다. 물론 크게 보면 사람도 자연에 속하는 유기체지만 사회현상은 사람들끼리의 현상이 대부분이므로 이러한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의 융합은 과연 올바를까라는 물음이다.
12. 후생경제학과 사회주의
냉전체제 전후에 사회주의의 발현이 시작되고 그러나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지금은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그들이 몰락으로 보는 것은 아마 급진적인 마르크스 주의일 것이다. 분명히 사회주의 운동에는 온건한 개량주의자들에서부터 혁명적인 마르크스 주의자들까지 광범위한 스펙트럼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들이 원했던 것은 첫째, 국가의 적절한 역할을 설정하기 위한 원리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국가는 경제생활에 개입해야 하는가? 두 번째는 사회를 재조직하기 위한 사회주의적·공산주의적 계획을 평가하는 것이었다. 물론 공공의료,노동조건,교육,수송,기타 등등 정부가 참여했고 극단적인 사회주의는 한계에 봉착하여 기력을 다했다. 그러나 한계주의는 오히려 사회 개혁을 옹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으로 하여금 국가와 사회복지라는 개념이 떠오른다. 생산을 먼저 분석하고 그런 다음 부의 분배를 분석하는 식으로 과정의 확장이 이루어 졌다. 과거 어떻게 생산하고 부를 획득할지에서 마지막 부분이 확장 되었다. 그래서 기존에 예외 조항으로 생각되던 개인들이 사회에 제공한 서비스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없던 경우[등대,조림(造林),과학적 발견]와 개인들에게 돌아가는 이득이 사회에서 귀속되는 이득보다 클 경우(기존 철도노선의 복선화)등과 같은 것들이 논의 되었다. 그중 시지윅은 국민배당금과 같은 국민의 기여를 보답하는 국가의 의무도 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중 피구는 후생경제학(The Economics of Welfare,1920)에 절정에 달했다. 그가 경제적 후생(economic welfare)라고 부른 것, 즉“화폐라는 측정 자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련지어질 수 있는 후생의 그부분”을 조사하는 확문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로잔 학파는 교환으로 자유경쟁이 후생 극대화를 낳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중 발라는 국가가 모든 자본 스톡을 소유하고 매매를 금지 시키더라도 가격과 이자율은 적어도 회계기관들에서는 놓아두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격과 이자율이 없으면 자본주의 하에서는 사회적 혼돈상태로 빠져 들 것으로 생각된다. 팔레토의 제자 엔리코 바로네(Enrico Baronce, 1859~1924)는 후생을 극대화하려면 완전경쟁적 균형에서와 동일한 조전이 충족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시장 사회주의자들이 프레드 테일러(Fred Taylor,1855~1932),디킨슨(H.D Dickinson,1899~1969),오스카 랑게(Oskar Lange,1904~1965)를 필두로 ‘시장사회주의자’(market socialists)로 알려지게된 경제학자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명칭을 붙게된 것은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한다는 점에서는 사회주의적이지만 소비재와 노동을 위한 시장이 존재하는 경제를 설계할수 있다는 그들의 주장 때문이다.
1930년부터 1960년 사이의 후생경제학은 팔레토의 최적성(pareto optimality)혹은 팔레토효율(Pareto efficiency)의 개념이 개발 되었다. 팔레토가 기술한 바에 따르면, 이 개념은 다른 누군가를 나쁘게 만들지 않고서는 누군가를 더 좋게 만들 수 없는 상황을 가르킨다. 그러나 고대 시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교정적 정의로서 이득자가 손실자에게 보상해주고 여전히 나아진 상태라면 변화는 편익적일 것이라는 것이 팔레토의 개선이었다.즉, 사회적 후생함수를 사용하여 상이한 가치판단 또는 윤리적 기준의 함의를 분석할 수 있었다. 개인의 후생이 증가하면(다른 누구의 후생의 변화없이)사회적 후생도 증가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사회적 후생함수는 존재하지 않는 점을 케네스 애로에 의해 입증되어버렸다. 그의 이른바 ‘불가능성의 공리’(impossibility theorem)였다. 이 공리는 사회적 선택이론(social-choice theory)이라는 전혀 새로운 분야의 경제학이 출현하도록 자극했다.이러한 새로운 논리는 소득이 적절한 방식으로 분배될 경우, 자원의 모든 팔레토 효율적 할당은 경쟁적 균형으로 전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장 실패와 정부 실패의 과정을 동시에 경험한다.공공재와 외부성은 모두 시장실패-경쟁적 시장이 자원을 팔레토 효율적으로 할당하는데 실패한다는 의미-의 사례이다. 이러한 시장 실패의 첫 번째 도전은 1960년에 로널드 코스(Ronald Coase,1910~)가 제기한 ‘코스의 공리’(Coase theorem)라는 것과 더불어 나타낫다. 코스는 피구가 했던 식의 외부성 논의과 경제활동이 수행되는 법률적인 틀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하지 못하는 시장의 실패는 경쟁의 실패 탓이 아니라 명확하게 정의댄 재산권의 부재때문이라고 코스는 주장했다. 공장주는 강을 불가피하게 오염하고 반면 농부는 강을 필사적으로 지켜야 하는 논쟁사이에 재산권이 구분된다면 시장 실패는 없을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론 공장은 이윤을 창출 해야되므로 아무리 어부 소유의 강이라도 자본이 많다면 새로운 방식으로의 오염으로 공장을 돌릴 것이라는 반론이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의 주요 주제는 이른바 국민적 자유 또는 자유경쟁 체계가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따라서 후생을 증대시킨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경쟁과 경제적 후생에 관한 공리였다. 이제는 경제학자들의 초점은 주어진 순간의 가용한 자원이 효율적으로 할당되는가로 집중되었다. 분과학문의 역사에서 종종 그러했듯이,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을 좀더 ‘과학적’인 것으로 만들려고도 했다. 1930년대에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것을 가치판단이 경제학의 핵심(core of economics)에서 제거되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13. 경제학자와 정책 1939~현재
경제학자들이 관료의 상층부에서 참모 역학을 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많은 나라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경제학 직업군의 성장에서 전환점을 이룬 한가지 이유일 것이다.미국에서는 1940년에 래플린 쿠리(Laughlin Currie)가 대통령 경제고문이 되었다. 그는 고위직에 전업으로 고용된 최초의 경제학자였다. 그리고 이후 자크 폴락(Jacques Polak,1914~),라울 프레비시로 그는유엔 경제위원회에서 산업국과 발전도상국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론을 개발했다.
14. 경제학 분과 학문의 확장
이 장은 슘페터의 다섯가지 유형의 응용분야 구분으로 대체하겠다. 첫 번째 유형은 화폐와 은행제도 같은 분야들이었다. 이 분야는 일반 경제학의 부분으로 널리 간주되지만 좀더 상세히 다루기 위해 별도로 교수되었다. 두 번째 유형은 순전히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경제학에서 분리된 보험 및 보험계리학(actuarial science)같은 분야를 포함했다. 세 번째는 농업, 노동, 수송, 재정 같은 공공정책에 기초한 분야들이었다. 마지막 두 유형은 사회주의,비교경제체제(comparative economic systems),지역 연구같은 분야의 혼합이었다.그는 이러한 분류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 잡다한 응용분야들이 영속적인 것도 아니며 논리적인 질서가 있는 것도 분명히 아니다. 그들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상대적으로 중요해지거나 덜 중요해진다. 그들은 관심과 방법의 변화가 지시하는 대로 서로 중첩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ps: 다분히 엄청난 거장앞에서의 작은 읊조림과 그들의 위대한 지성을 비교하면서 읽었다. 물론 에센스 작업을 하면서 주석을 달아놓은것과 결합한다는 것은 다소 비약이 있었지만 스스로의 생각을 그나마 글로써 표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위의 책에 대한 독서에 대한 소고를 적으면서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정말 짧고 아둔한 글을 쓰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로저 백하우스(Roger E.Backhouse)이사람은 엄청난 경제학의 역사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크게 느꼇다. 지금 내가 메모한 노트와 글로 쓴 량을 모으더라도 책 한권을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으니...
그리고 과거의 철학이 고민이 이전에 경제학자들이 생각했던 것과 일치 했다는 것을 알았다.그래서 허무하면서도 스스로가 자만했었다는 것을 함께 느끼게 된 점은 시장은 항상 나를 포함하고 있고 항상 주도적이고 소수적인 생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장의 저서였다. 다시한번 책을 권해준 마음의 멘토 미네르바와 장하준 교수님의 감사를 전할수 없겠지만 자기성찰 하는 신명석이 되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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