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서재속에는2018. 5. 11.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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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별점: 별점 9점(10점 만점)
한줄평: 꼬리를 무는 논리적 물음.
플라톤은 기원전 4세기경 살았던 철학자이자 천문학자이자 과학자이다. 그의 스승은 소크라테스이고 소크라테스의 사형 소식을 듣고 세계 곳곳을 방랑하며 살았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적 이념을 바탕으로 이상국가를 실현하려고 했으나 많은 정치인에게 반감을 사면서 실패했다.
책 구성의 특이점은 대화체로 기록되어있다는 것이다.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와 아만테이토스, 글라우콘이라는 플라톤의 형이 나온다. 또한 케팔로스 폴레마르코스의 그가 이상국가를 세우려고 했던 귀족들도 나온다. 과거의 기록된 책이라고 그들은 우리와 다른점이 없었다. 그들은 대화에 경청하고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내용을 기억하는데 있어서 많은 양을 기억하고 있고, 대화의 논점과 논리적 흐름은 지금의 현인들의 대화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책은 개인으로 시작하는 인간의 본성과 그에 따르는 현상을 논한다. 또한 개인이 뭉쳐서 국가가 만들어지는 순서와 당위성을 말하고 국가를 다스리는 수호자의 성품이나 행동에 대해서 논한다. 또한 수호자가 가져야 될 성품 중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이 명예, 부를 갈망하는 마음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탐색한다. 그리고 이상국가가 갖춰야할 자질과 이상국가가 되지 못한 국가의 형태를 말하며 세계를 구성하는 '이데아'를 사고해본다. 그의 저서는 파피루스 종이에 빼곡히 적어놓은 낙서와 비슷할 지라도 그가 담은 '국가론'이라는 내용은 지금까지도 통찰력을 제시해주기에 충분하고 현실성있는 이야기로 다가온다.

-과연 정의란 무엇일까?
이 주제에서는 오늘날 사람들이 읽어서도 공감할 내용을 다룬다. 그것은 '실제로 악한 사람이 겉으로 정의로운 척하고 모든 명예와 부, 이득을 챙긴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이러한 내용은 나온다. 그러나 제자의 말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산파설은 재치를 발휘한다. 그가 말하는 논거의 핵심은 의사가 의사로서의 도리를 할 때 의사라고 부르고 선장이 배를 잘 몰아야 선장이라고 부를 수 있듯이 사람은 사람의 구실을 하여야 사람이라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람이란 것은 정의를 행하는 사람으로 겉으로 거짓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적에게 대한 정의는 악으로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적에 대한 정의도 정의로 배푸는 것이 정의라고 설파한다.또한 정의로운 사람은 다른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탄생, 좋은 수호자가 되기 위해
국가의 탄생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설명은 길지않지만 이해도가 높게 다가온다. 국가 또한 정의를 위해서 뭉친다는 것이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는 있지만 힘든 삶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분업이라는 보이지 않는 기술을 통해서 농부,목수,상인,대장장이,의사, 그리고 수호자로 분화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시작점에서는 동일하고 평등한 지위가 되지만 각 업종의 특징에 의해서 명령을 받거나 내리는 관계에 들어선다. 그래서 국가는 수호자의 능력에 따라 운영되게 된다. 그래서 수호자는 좋은 교육과 좋은 경험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당위성이 성립된다. 그래서 좋은 수호자가 되려면 우선 가져야 될 것을 논한다. 그 중 우선이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명예, 부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알았을 떄 기쁨을 알지 못한다. 반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명예,부가 부질 없다는 것을 알기에 진리와 지혜만을 탐구하고 이것은 정의로운 사람이 되는 길이다. 그렇기에 국가는 자연히 발전하게 되고 설사 땅이 좁아 정복전쟁을 나설 때에도 타국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통일된 국가는 더욱 발전해간다는 것이다. 

-세상을 구성하는 '이데아'
우리는 휴대폰을 보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전자회사에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것은 휴대폰을 모습을 하고 있는 잠시동안(10년정도) 휴대폰의 기능과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휴대폰은 이데아라고 하는 개념에 있다고 한다. 휴대폰의 이데아는 영원하고 일정한 휴대폰의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휴대폰의 이데아는 하나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마치 노자의 도덕경에서 보는 '도'의 비슷한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본질과 현상을 본뜬 사물을 이데아를 대체해서 이름을 붙인다. 아이러니 한 점음 진짜 휴대폰 이데아가 나타나면 지금 눈앞에 있는 휴대폰이라는 것은 휴대폰으로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휴대폰 모습으로 하고 있는 전자기기라고 이름이 바뀐다는 것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이상국가에 시인이 없어야 된다는 논리와 부합된다. 시인은 이상국가와 여러 감정들을 노래한다. 그러나 이상국가에서는 시인은 이상국가나 감정을 나타낼 수 없다. 왜냐하면 이상적인 국가는 이상적인 개인과 합치되고 더이상 나아질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현실에 실현되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그가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 내고 상대를 설득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이란 것을 느꼈다. 단지 그 자리에서만 설득된다는 점은 아쉬운 점이지만 말이다

-산파술, 국가, 정의, 선의 이데아를 아우르는 고대의 고전은 많은 시사점이 있다. 사람은 오랜 세월(기원전)부터 공통된 본성은 크게 변하지 않고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재귀성관계와도 연관성있다. 왜냐하면 인간 스스로 판단하고 정의하고 규정하고 이론화하는 것은 아직도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 개인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지는 것은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아무리 똑똑하고 지혜를 가진 사람들도 피할 수 없는 숙명적 경로를 걷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지혜를 알고 스스로의 행동을 인지하는 힘은 우리의 마음과 머리속에서 행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러한 점은 부정할 수 없는 공존관계에 있다. 그의 화법을 들으면서 마치 법정에서 피고를 유도심문을 하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가 펼치는 말은 사람의 본성과 행동을 꽤뚫는 내용이 많았다. 2000년이 넘게 흘러도 이 글이 계속해서 내려온 다는 것은 그 만큼 고전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아닐까? 나도 다른 사람이 지혜를 찾으면서 느끼는 행복감과 기쁨을 주는 글과 행동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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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