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서재속에는2013. 6. 29.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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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저자
찰스 P.킨들버거 지음
출판사
굿모닝북스 | 2006-11-25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투기적 광기에서 비롯되는 거품과 이에 뒤따르는 금융위기에 관한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금융위기는 자본주의 위에서 피어오르는 끈질긴 다년생화다.

 

 나는 찰스 P 킨들버그를 이러한 문장으로 그를 기억한다. 이 말을 위한 내용이 책의 전부를 차지한다 이 책은 버블 생성과 버블 성장, 버블 붕괴의 메커니즘 귀납적으로 제시한다. 그의 책은 다분히 예시 중심적이고 역사의 뒷받침에 의지한다. 그래서 이 책은 통찰적 시각을 가지기 쉬울뿐 아니라, 케이스는 실증적이기 까지하다. 그의 책은 분명 최고점을 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나와의 만남은 그리 좋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조지 소로스의 투자철학을 알고 있는 자들에겐 단순한 케이스 모음집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과연 버블이란 무엇일까?

 

 버블의 공리적 정의를 내려보자. 이러한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 버블은 자본주의에서만 일어나는 사회현상이 될 수도 있고, 우주 전체를 통틀어서 나타나는 자연현상이 될 수도 있다.

 버블,거품의 정의는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협의적으로 정의내리겠다. 인간은 끓임없이 소유하거 권리를 가지고 있는 대상을 만든다. 버블은 인간이 소유한 대상의 내재가치보다 통상적으로 평가되는 가치가 커지는 것이 버블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를 광의적으로 넓혀보자. 버블은 가치차이이다.  즉, 인간에게 필요한 산소가 혐기성 미생물에겐 독이되는 것처럼, 각각에 필요한 요소가 다르고 그에 따라 나타나는 필요성의 차이가 버블이다.

 그렇다면, 우리 생황에 영향을 미치는 버블은 광의적인 것이다. 다만, 우리는 자연현상을 바꿀수 있는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자본주의 위에서 피어나는 끈질긴 다년생화에 대한 연구를 해야된다. 저자는 이러한 연유로 끓임없는 케이스 연구를 하는 것이다.

 그는 궁극적 대여자와 하위 기관,그리고 개개인으로 뻣어가는 유동성의 순환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유동성의 순환과정에서 나타나는 투기적 수요 자체가 버블을 촉발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투기적 수요는 제도적,교육적으로 억제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 궁극적 대여자의 역할은 단순히 유량하지만 유동성에 곤란을 겪고 있는 기관을 살려주는 것이 올바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페러다임의 필요성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생각하는 것은 자본주의 위라는 전제다. 물론 나는 그의 지성이나 노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페러다임과 메커니즘이 제시되는 지금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일 뿐이다.

 새로운 메커니즘과 패러다임의 제시의 필요성은 있다. 나는 새로운 페러다임이 온다. 그들이 온다. 이것을 외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최적 효용을 자랑한다. 충분한 능력이 있는 자는 원하는 것을 최적의 시간과 최적의 효용으로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서있는 곳의 룰이며 공리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최고 효용을 발휘 할 수 없는 메커니즘이다. 즉, 인간에게 능력이 없다면, 최적의 효용이든 최적의 시간이라는 것 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공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능력을 빼앗기도 한다. 과정은 단순하다. 충분한 능력을 가진자는 버블을 만들어 내길 원할 것이고, 이것은 후발로 들어오는 시장참여자의 능력을 상실하게한다.-시장의 붕괴위험으로 인한 금융위기로인해. 그래서 이 금융 다년생화가 씨가 퍼지고 생기고 죽고 하는 동안 능력이 있는 자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공격해 버린다.


 이러한 메커니즘이 과연 최적의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단순히 말해 자본주의 세상위에 있기 떄문에 이러한 버블과 붕괴의 순환이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과정이 인간의 창조적 파괴과정이라고 말한다. 물론 일리가 있다. 버블의 성장과 붕괴의 과정속에서 우리는 디지털,나노기술,생명공학의 높은 기술을 구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금융 자본주의 주장자는 자본주의가 없이도 이러한 기술을 발전해내지 못했을 까라는 물음을 해보지 않은듯하다. 또한 창조적 파괴과정은 파괴의 범위가 너무나 광대하다. 그것을 붕괴전의 상태로 돌려 놓을 순 없다. 왜냐하면 오늘이 지난 내일은 오늘과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비슷하게나마 버블 전으로 돌아가는데도 시간은 피해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우리나라 GDP -4%성장이 나타내는 것은 15년전 경제규모로 돌아간다는 말과 같다. 우리는 인간 그대로의 인간이다. 즉, 충분히 지금의 자원(인적,물적) 을 통해서 최고의 조합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돈이라는 진통제에 취해 이러한 명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ps: 책의 번역탓인지 책이 많이 난해합니다. 논리적으론 이해가 가는데 약간 힘듬.눈운동에 좋은 책이지만 곱씹어 보면 좋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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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탠스
내 서재속에는2012. 12. 4.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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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SWAN

- 흥미로운 사건으로 서평을 시작해보자 한다. 2008년 9월이었다. 다음 아고라에는 미네르바가 올린 글이 많은 논쟁과 비난과 의문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월가의 은행이 휘청거리면서 내뿜는 변동성으로 글로벌 경제가 요동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었다. 많은 전문가들이 당시의 금리와 경제지표상에 주목할 만한 악재가 없으며 단지 미국의 문제는 미국 자체에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점쳤다. 통계를 활용한 통계적 의견은 대부분이라는 말이 '항상'으로 왜곡 되면서 블랙스완의 출현을 야기한다. 얼마 되지 않아 환율은 폭등하고 세계 주식시장은 같은 변동폭-하락의 방향성-이 일치되면서 금융시스템의 파국적 위험까지 선보인다. 그리고 약 2개월 간의 연속적인 악재의 출현은 많은 헤지펀드와 연기금의 손실을 입히고 개인금융자산에게 까지 타격을 입혀서 블랙스완의 진가를 다시 각인시켜준다. 그리고 더욱 흥미로운 점은 시장을 둘러싼 인간들의 자기 기만적 행위는 우리에게 많은 성찰을 하게 한다. 이러한 한국의 파국적 시장 상황은 단지 미네르바에게 있으며 그가 말한 자기실현적인 전망으로 인해 환율이 오르고 주식시장이 떨어졌다고 정부는 탓을 한다. 그리고 조용히 정부는 블랙스완에 대해 논하는 자를 잡아들이거나 조용히 하게끔 사회분위기를 형성해낸다. 오늘날 정부당국은 여전히 같은 행동을 하는 것 처럼 보인다. 이렇듯 블랙스완의 출현은 많은 사람들은 당혹스럽게 혹은 괴롭게 만든다. 인간의 인지능력을 왜곡할 만큼 조용히 다가와 대부분이 믿고 있는 공리나 정의를 역전시켜버리는 하나의 사례의 출현은 아이러니 하지만 세상이 더 발전할 수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Black Swan 이야기

Black Swan 이야기는 14세기 부터 전해오는 명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조는 무조건 희다"라는 명제는 많은 세기에 걸쳐서 참으로 인정받고 귀납적인 사례로 참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때로 거슬러 올라가 내가 백조는 왜 항상 흰색일까요?라고 묻는다면 아마 유럽사람들은 "지금 까지 내가 본 백조는 전부 흰색이었고, 나는 검은 백조를 본적이 없소"라고 자신있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4세기가 지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진출 했을 때, 상상도 못할 사건이 발생한다. 그들은 호수를 멍하게 바라보았고 그들의 눈 앞에 보란듯이 유유히 지나가는 검은백조를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우선 자신의 눈을 의심했고 다음으로 받아보는 검은 백조가 정말 백조와 가은 종류인지 의심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의심한 것은 "백조는 무조건 희다"라는 명제였다. 과거 이 명제는 수천만 마리의 백조의 색깔과 400년에 가까운 장구한 세월 동안 관찰적 행동으로 얻어진 확고한 결과물-명제-였으나 지금 내 눈앞에 검은 백조를 검은백조가 아니라고 의심하고 왜곡하는 편향을 심어준 거짓 명제였던 것이다. 사람이 믿는 명제에 대한 권위가 한순간의 거짓으로 검증되는 순간은 아주 미약하고 어의없는 사례 일 수도 있다는 점을 아주 잘 표현한 이야기이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그는 스스로를 회의주의적 행동가라고 말한다. 나도 이러한 사람을 닮고 싶은 생각을 계속해서 해왔다. 이유는 그가 주창하는 블랙스완은 내가 기존에 거부하며 알고있던 재귀성 오류 메커니즘과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크레타인의 역설과 같은 자신스스로를 수식할 수 없는 관계에서의 규정은 언제나 불완전성을 내제한다는 말 처럼 그는 모든 금융이론은 언제나 통계학적바탕으로 하여 오류가능성과 파국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다소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정말 일선에서 활동하는 행동가이고 지성으로 비교하자면 많은 지혜를 가진 현자라는 점이다. 나는 단지 금융시장에 발만 담그는 아주 소박한 행동을 하고 있으며 지금도 나의 무지가 너무커 무지에 대한 무지도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는 고단하고 외로운 길(A demanding and lonely path)을 '선택'한 사람이다. 그리고 다이너믹 헤지(Dynamic Hedge), 능력과 운의 절묘한 조화라는 또 다른 저서를 내어 놓았다.

-블랙스완이 나에게 주는 삶의 의미

통계적으로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좋은 책을 만날 확률은 극히 드물다. 또한 좋은 책을 연속적으로 만나는 행운은 통계적으로 더욱 드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통계 속에서 우리는 잘못된 결론을 내린다. "나는 언제쯤 좋은 책을 만날 수 있을까?" 한숨 섞인 말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는 자신이라는 인격을 배제했지만 세상의 진실은 배제할 수 없다. 그것은 추천도서를 읽거나 정말 좋다는 책을 선물 받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통계학에서 말하는 10시그마 이벤트(평균에서 매우 많이 떨어진 값이나오는 경우)처럼 어렵지도 이상현상도 아니다. 나에게도 이러한 행운이 따라준 것일까? 블랙스완은 내 생일에 선물을 받았던 책이다. 약 두달여간의 추천도서 읽기를 끝마치고 선물받은 책을 빼들었을때 앞쪽형 인간, 천재들의 실패, 코스모스 이렇게 연속적으로 좋은 책을 만나게 되었다는 겸허한 기쁨을 느꼈다. 연속해서 좋은 책을 만나는 것은 통계적으로 너무나 어렵고 상당한 기간 동안 독서를 해야된다는 기대값이 있지만, 나의 경우엔 주위 사람들의 도움과 많은 분들의 추천에 의해 좋은 책을 만나는 확률이 높아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독서에 대한 통계적 값을 믿어야 될까? 후자인 독서에 대한 경청의 행동을 믿어야 할까? 블랙스완에서 약간 비약이 있지만 말한다면 아무것도 믿지도 말고 무시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통계가 연속적으로 틀렸다면 블랙스완의 출현을 상기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사고는 많은 세월동안 평균적이고 일반적인 생각에 적합한 구조로 설계되었다. 아마도, 호랑이를 만났을 때 저 호랑이가 순한 호랑이든 포악한 호랑이든 사람을 헤칠 가능성이 컷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호랑이를 만나면 도망가는 것이 옳다라는 명제가 거짓이든 참이든 나에게 있어서 생존확률을 높여주는 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숨쉬는 이 세상에서 사람을 본다면 저 사람이 가난하거나 부자라면 찢어지게 가난해 당신을 헤치고 돈을 강탈 할 수도 있지만 엄청난 부자라면 당신의 환대에 고마워하며 10만달러짜리 수표를 내어줄수도 있는 일이다. 말 그대로 평균값이라는 것은 통계학자들이 극단의 세상에서 지어낸 쓸모 없는 지표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사례이다. 물론 통계가 쓸만한 곳은 여전히 많다는 것은 인정한다. 분명 통계가 엉터리인 곳이 있다는 말은 통계가 쓸 만한 곳이 전혀 없다는 말과 다르다. 그러나 나의 말이나 저자의 주장,칼포퍼,조지 소로스의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앞의 두 명제가 서로 같다고 느끼는 인간의 인식체계가 여전히 작동한다. 개인적인 사견이지만, 내가 자주 만나는 사람들도 이러한 인식 체계를 꼬집는 나의 말이 기분나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말을 해서 사람들에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을 즐기는 것도 아니다. 다만 왜곡되게 말하지 않는 것을 피하면서 말하는 점에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직 없다는 것과 내가 너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때문이라는 말은 분명히 다른데, 내가 전자를 말한다면 상대방은 내가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동안 애를 태운적이 있었고 내가 말하는 방법이 잘못되었을까라는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회의의 좋은 점은 가치에 균형을 찾아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공리와 정의와 규범은 지키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당연시하고 옳다고 여기는 명제에 대한 회의는 항상은 아니지만 가치에 균형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 내가 회의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점이다. 천동설에 대한 회의가 태양계 속의 지구의 올바른 위치를 알려줬을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에 대한 회의가 사람의 인지체계에 대한 연구를 가속화 시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펼때도 언제나 확신과 단언이 아닌 가능성에 대한 제기와 산파술 같은 물음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재귀와 블랙스완의 논지가 흐릿하고 정체성 없는 학문이라고 비난한다. 이러한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블로그나 많은 댓글을 통한 교류를 보면 재귀론이나 블랙스완에 대한 비판은 "정체도 없는 주장이면서 상대방을 비난한다","이 주장을 받아들이려면 그 재귀성오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조귀성 오류를 부정해야 받아들일 수 있다.이것은 모순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비난한다. 나는 이러한 비난에도 겸허히 수용할 수 있으며 언제나 오류가 있으면 시인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주로 나오는 재귀성에 대한 비판은 간단한 사례로 반박할 수 있다. "정체도 없는 주장"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모순이다. 정체가 없는데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체가 있기에 상대방에게 보이는 것이고 다만 상대방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화라는 감정이 먼저 솟아올라 자신의 어렴풋한 생각을 쓸 뿐이다. 그리고 생각에는 형태라는 수식이 무의미하다. 다소 회의적이긴 해도 주장은 문자나 음성과 같은 매게체를 통한 다른 생각이 나의 인식체계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주장은 원래 형체가 없는 것인데 어떤 한 주장만이 형체가 없는 주장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그리고 스스로를 부정한다고 해서 받아들이는 자의 생명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존심의 문제이지 생명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볼 때, 재귀성 이론의 수용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나는 나의 불완전성을 알고, 이 세상이 단지 푸른 반점에 지나지 않으며 그 속에서 어우러져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모든 생활에서 이러한 앎에서 실천의 영역은 비록 힘들지라도 내 삶을 흥미롭고 가슴뛰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금융시장은 이러한 나의 생각의 스케치에 있어서 하얀 도화지를 언제나 마련해주고 재귀성 오류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선생님이 되어주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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