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블로그2012. 1. 6.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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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화학, 생물학 같은 자연과학은 관찰 가능한 객관적 대상을 탐구한다. 과학으로서의 심리학도 마찬가지로 대뇌와 마음의 활동, 작용, 행동과 같은 객관적 대상을 탐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탐구만으로 심리학을 생각하기에는 뭔가 허전하다는, 뭔가 중심적인 탐구의 주제가 빠져 있다는 인상을 떨칠 수가 없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사람의 ‘주관적인 의식’이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특정한 한 시점에서의 자신과 타인을 포함한 이 세상에 대한 주관적인 경험 상태라는 의미에서의 의식의 내용, 작용, 변화의 과정이, 어찌 보면 나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을 출발시킨 분트는 심리학이 의식을 분석하는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과학에서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를 찾아내듯이, 마음과 의식 경험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를 분석해 내는 내성법(introspection)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색깔을 보거나 소리를 듣고, 자신의 의식 내용을 스스로 관찰하며 순수한 감각 경험과 이와 연합된 느낌을 보고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의식적 경험의 기본 구조를 밝혀내고자 했다. 탐구의 목표는 야심찬 것이었지만, 과연 이러한 자신의 의식 들여다보기만으로, 그리고 이를 언어적으로 표출하는 것만으로 의식의 본질에 접근하고 과학적인 탐구가 가능할지 회의 할 수 있다. 사실 분트 이후의 심리학도들도 같은 문제에 당면하고 아예 심리학적 주제에서 의식을 제외하기도 하였다.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혹은 우리 삶의 질을 증진하는 한 방법으로, 의식적인 생각이 없어지게 하거나, 

어떤 모양이나 소리, 혹은 호흡에 집중하는 기법이 소개되고 공유되고 있다. <출처: gettyimages>

 

 

의식 자체에 대한 탐구보다,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서 의식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의식의 본질을 탐구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주관적인 자의식이 없어지는 것 같은 수면 상태, 수면에 빠지며 전혀 다른 의식의 세계로 떨어지는 꿈 경험, 약물이나 최면에  따른 의식의 변화, 명상이나 종교적 경험에 의한 변화 등이 예가 될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명상에 대해 최근 연구를 살펴보자.

 

 

명상이라는 의식 변화

최근 들어 불교나 요가의 명상이나 혹은 마음챙김(mindfulness)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혹은 우리 삶의 질을 증진하는 한 방법으로, 의식적인 생각이 없어지게 하거나, 어떤 모양이나 소리, 혹은 호흡에 집중하는 기법이 소개되고 공유되고 있다. 필자도 학생들에게 일상생활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명상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도 시도해 보길 바란다. 우선 조용한 장소와 편안한 자리를 찾아 편하게 앉는다. 그리고 가능한 모든 몸 부위의 긴장이나 경직을 풀도록 한다. 잘 되지 않으면 반대로 힘을 세게 주었다가 풀면 된다. 즉 손이나 팔에 힘을 잔뜩 주었다가 서서히 풀면 된다. 그리고 눈은 감고, 배로 크게 일정하게 호흡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의식을 즉, 주의를 자신의 호흡에 집중한다. 딴 상념이나 생각이 떠오르면 좇아가면 안 된다. 그렇다고 의식적으로 모든 생각을 쫓아내려고 하지 않는다. 항상 주의를 자신의 호흡에 되돌리려고만 하면 된다. 이렇게 10여분 하다가 보면 잠시 잠에 떨어 질 수도 있다. 불교 수련에서는 잠에 빠지면 안 된다고 하지만 우리들은 그렇게까지 엄격할 필요는 없다. 필자도 걱정거리가 있을 때, 일에 집중할 수 없을 때, 피곤할 때 종종 이 방식으로 명상을 하다가 잠시 낮잠에 빠졌다가 깨어난다. 사실 본격적인 명상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라고 일종의 낮잠 자기일 수 있지만 말이다. 여하튼 하고나면 정신도 맑아지고 다시 힘도 생기는듯한 느낌은 확실한 것 같다.


최근 들어 불교나 요가의 명상이나 혹은 마음챙김(mindfulness)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출처: gettyimages>

 

독자들도 이미 알고 있듯이, 이러한 명상이 건강과 수행을 증진시키며, 면역 기능을 좋게 하며, 혈압을 낮추고, 여러 인지 기능을 좋게 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기에 그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의식의 변화라는 측면에서의 명상 경험을 이해하고자 하는 심리학도에게는 그 구체적인 변화의 기제 혹은 명상 경험의 구성성분들이 여전히 궁금증으로 남아 있게 된다.

 

최근 발표된 논문에서 홀젤(Holzel)과 동료들은, 명상과 관련된 여러 연구들을 종합하고 묶어 명상에 관한 커다란 그림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명상이 어떤 단일 기술이 아니며, 여러 기제들을 포괄하는 다면적인 심성 훈련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음챙김 명상의 효과를 설명할 수 있는 네 가지 구성성분, 즉 주의 제어(attention regulation), 몸 자각(body awareness), 정서 제어(emotion regulation), 자아감(sense of self)을 구분하고 있다. 각 기제가 다음 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마음 챙김의 4가지 구성성분

 

 

물론 이 네 가지가 이론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명상 경험의 구성성분이지만 그 작용은 서로 얽혀 일어난다. 예를 들어 주의 제어의 증가가 직접적으로 우리의 생리적 상태에 관한 자각을 촉진 할 수 있고, 높아진 신체 자각으로 자신이 경험하는 정서를 쉽게 알아채도록 도와 줄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히 해야 할 것은 명상은 훈련과 연습을 필요로 하며, 이를 통해 긍정적인 신체적, 행동적, 대뇌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앞에서 필자가 권했던 명상법은 위의 네 구성성분 중 주의 제어와 신체에 대한 자각만을 포함하고 있다. 보다 세련된 명상 기법을 독자들도 체득하여 자신의 삶에 활용하길 바란다.

 

 

참고문헌
Holzel, B. K., Lazar, S. W., Gard, Schman-Olver, Z., Vago, D., Ott, U.(2011). How Does Mindfulness Meditation Work? Proposing Mechanisms of Action From a Conceptual and neural perspective. Perspectives on Psychological Science,6,537-559.

 

 

 

 김영진 /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심리학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 켄트주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있으며 [인지공학심리학:인간-시스템 상호작용의 이해], [언어심리학], [인지심리학], [현대심리학개론] 등의 저작이 있다.

발행일  2012.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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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탠스
배움블로그2011. 10. 12.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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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10명중 3.5명은 1년에 전혀 책을 보지 않는다... !!!

문화 체육관광부가 지난해 초중고등학생 3천명과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2010년 국민 독서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국민 연평균 독서율이 65.4%로 나타났습니다. 이 수치는 만화나 잡지를 제외한 일반도서를 1권이라도 읽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 중 성인들은 10명중 3.5명 정도가 1년에 한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의 독서량은 2009년에 비해 더 늘었다고 합니다. 즉 책을 한달에 1권이상씩 꾸준히 읽는 사람들은 해마다 책읽는 양이 늘어나는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어른들의 책 읽기를 방해하는 것들.         


 

BUSTED! Using a Mac.
BUSTED! Using a Mac. by colorblindPICASO 저작자 표시비영리


1. 집중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요즘은 중산층도 마음의 여유가 없는 가정이 늘어났습니다. 부부가 함께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치열한 사회생활에서 살아남으려면 업무에 고도의 집중력을 보여야합니다. 토익이니 자격증이니 스펙쌓기에 많은 두뇌를 집중해야 하죠. 또 스펙을 쌓을 필요가 없는 직업이라도 하루 노동시간이 길면 집에 와서 골치아프게 책을 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2. 여가시간에 쉬운 놀거리들이 많다.
성인들의 여가시간은 수면시간을 제외하고 평일 3.5시간 정도, 휴일도 6시간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직장이나 학교에 머무는 시간 외에도 집안일이나 아이돌보기 같은 의무 노동시간에다 씻고 밥먹는 등의 필수적인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러면 하루 24시간 중 저녁 3시간 정도만 온전히 편한 시간인데, 이때 TV나 인터넷, 게임이라는 아주 쉽고 재밌는 놀이거리가 바로 눈앞에 있습니다. 하루의 80%에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했으면 20%정도는 오락을 즐기고 싶을 것입니다.

 

3. 책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학창시절 학교 선생님의 독려로 읽었던 책은 강압에 가까웠고, 그때 데었던 사람들은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기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죠.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통찰의 깊이를 더해가는 기쁨과 자신이 무지해서 누군가 만들어 놓은 룰에 휘둘리고 있다는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책을 아예 읽지 않으면 자신이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얼마나 무식한지 전혀 모르니 필요성 또한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죠.

 

 

 

        어른들이 꾸준히 책을 읽을 수 있는 방법.        

1. 강한 동기를 가진다.
그동안 책이라는 단어만 생각하면 고개부터 흔들었던 사람은 책읽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고, 나쁜 욕구를 통제하며 꿈을 이룹니다. 그 사람들은 읽기 싫은 책을 성공하기 위해서 평생 억지로 읽었을까요?

책읽기는 첫시작이 다소 어렵습니다. 영어공부처럼 처음 도전해보았다가 두세달만에 흐지부지 되기 일쑤인 장르이지요. 그래서 책읽는 맛을 알때까지 강한 필요성을 가져야 합니다.
자녀에게 좀 더 나은 교육을 하기 위해서라든지, 직장상사와 관계가 너무 껄끄러운데 어떻게 이겨내야할지, 좋아하는 스포츠나 유명인이 있는데 관련된 책은 없는지, 외롭고 쓸쓸한데 치유해줄 도서는 없는지... 등등

 

2. 자기 통제를 해야한다.
사실 첫 시작은 당장 관심있는 분야의 책으로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무식을 깨닫고 책에 대한 무한한 기쁨을 느끼려면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친구와의 약속을 서점에서 잡던지, 한달에 한번 이상 꼭 도서관에 들르던지 책을 읽기 위한 습관을 들여야합니다. 신간이 무엇인지, 베스트셀러가 무엇인지 둘러보고, 관심있는 코너에 가서 제목들을 훑어보고 들춰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서점을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니며 책들을 들춰보다보면 일상의 아주 사소한 문제까지 해결해보려고 노력한 전문가들이 상당히 많다는데 놀라죠.
'어..? 이거 평소에 내가 궁금해했던건데....!!'
라는 생각을 했다면 책의 즐거움에 빠지기 일보직전입니다.

 

3. 문제 해결에 족집게 도사만을 원하지 않는다.
제가, 가끔 고민을 얘기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보라고 하면 새로운걸 배우기가 싫다는 둥, 또는 나보고 한방에 문제를 해결해 줄 책 한권을 추천해 달라는 둥 꾸준히 책보기를 거부하는 대답을 많이 듣습니다.
정신적인 문제의 답을 얻으려면 정신과 의사를 찾아야하고, 교육의 문제를 찾으려면 교육전문가를 찾아야 하지만, 자꾸 직장을 그만두는 등의 전문가를 찾기 힘든 문제는 스스로를 포기하거나 세상을 원망하면서 문제를 방치해버리는 일도 생깁니다. 사실 각분야의 전문가를 찾는 것은 많은 돈이 듭니다. 설사 상담을 해도 인생의 많은 문제에 모두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전문가들은 책을 많이 냅니다. 단돈 만원정도만 있으면 그런 전문가의 심도있는 지식을 내것으로 만들수 있습니다.

 


 

Västerås Stadsbiblioteket
Västerås Stadsbiblioteket by 아침놀 저작자 표시동일조건 변경허락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력이 필요하죠. 그럴때 옆에서 책읽기의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알려주고, 분위기를 조성해주면 훨씬 읽기 쉽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이나 주변에 책이 없는 환경에서 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면 책읽기에 빠진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극을 받게되고, 책읽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책에서 얻는 지식의 즐거움에 빠지게 되면 TV나 인터넷의 얕은 지식들이 시시하게 느껴집니다. 여가 시간을 TV나 다른 유흥거리에 할애하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에 좋지만, 책의 재미에 빠지면 이런 매체에 중독되지 않습니다. 틈틈이 책읽기를 절대 빼먹지 않게 되지요.

 

그래도 지금 이 글을 읽어보는 사람이라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필요성 내지 중요성은 알고 있는 분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분들은 책을 꾸준히 읽기 위한 자기통제의 방법을 고민해야하지요.
가장 문제는 책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런 분들은 책읽으면 얼마나 좋은지 그 기쁨을 환기시켜주어야 하는데,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없는 경우가 많을테니 국가나 미디어가 지속적으로 책읽기의 기쁨을 노출해주어야 할것 같습니다.

홍대 작업실이라는 북카페. ..
홍대 작업실이라는 북카페. .. by fffflip_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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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블로그2011. 8. 29.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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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모 방송사에서 방영했던 ‘0.1%의 비밀’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전국모의고사 전국석차가 0.1%안에 들어가는 800명의 학생들과 평범한 학생들 700명을 비교하면서 도대체 두 그룹 간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를 탐색해 보는 부분이 중요하게 다뤄졌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 제작 당시 제작진과 자문역할을 했던 필자에게 공통된 고민이 하나 있었다. 여러모로 조사를 해 보았는데 이 0.1%에 속하는 친구들은 IQ도 크게 높지 않고, 부모의 경제력이나 학력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고민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 메타인지!” 곧 이 친구들을 대상으로 우리는 색다른 실험을 해 보았다.

서로 연관성이 없는 단어(예, 변호사, 여행, 초인종 등) 25개를 하나 당 3초씩 모두 75초 동안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얼마나 기억할 수 있는가를 검사하였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검사를 받기 전 ‘자신이 얼마나 기억해 낼 수 있는가’를 먼저 밝히고 단어들을 기억해 내는 것이었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0.1%의 학생들은 자신의 판단과 실제 기억해 낸 숫자가 크게 다르지 않았고 평범한 학생들은 이 둘 간의 차이가(더 많이 쓰던 혹은 적게 쓰던 간에) 훨씬 더 컸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기억해 낸 단어의 수 자체에 있어서는 이 두 그룹 간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기억력 자체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자신의 기억력을 바라보는 눈에 있어서는 0.1%의 학생들이 더 정확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바로 메타인지 능력에 있어서의 차이이다.

우리 자신의 사고능력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 메타인지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본다고 가정해보자. “네 혹은 아니오로 가능한 빠르게 대답해 주세요.”라고 지침을 준 뒤, “우리나라 수도의 이름을 아시나요?”라고 묻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네”라고 매우 빠르게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어떨까? “과테말라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의 이름을 아시나요?”라고 말이다. 아마도 “아니오”라는 대답이 매우 빠르게 나올 것이다. 먼저의 질문에 대한 “네”라는 대답과 거의 같은 속도로 말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것이 인간의 두뇌가 지닌 특별한 능력이며 최소한 현재까지의 컴퓨터는 지니고 있지 못하는 기능이기도 하다.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왜 그런지 알아보자. 간혹 우리는 컴퓨터에 내가 원하는 파일이 있는지(즉, 컴퓨터가 그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검색 기능을 사용한다. 검색 창에 파일 제목을 입력하고 ‘검색’ 버튼을 클릭하면 컴퓨터는 열심히 그 제목에 해당하는 파일이 있는지를 검색한다. 만일 찾고자 하는 파일이 그 컴퓨터에 있다면 어느 순간 그 파일의 제목과 위치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 파일이 컴퓨터에 없다면(즉, 컴퓨터가 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되는가? 상당한 시간을 소모하면서 컴퓨터의 하드디스크 끝까지 검색해 본 후에야 “그런 파일은 없습니다” 혹은 “파일을 찾지 못했습니다”와 같은 메시지를 보여준다. 이 메시지는 결코 파일을 찾았을 때의 메시지보다 빠를 수가 없다. 즉, 컴퓨터는 “아니오, 모릅니다.”라는 대답을 “네, 알고 있습니다.”라는 대답보다 언제나 느리게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왜 인간은 이 두 종류의 대답을 거의 같은 스피드로 할 수 있는 것인가? 단순히 컴퓨터의 CPU와 같은 우리의 뇌 구조물이 이를 빠르게 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른다는 대답을 할 때 우리 뇌의 전체를 이른바 ‘스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판단을 내려주는 걸까? 바로 메타인지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른다는 대답을 할 때 우리 뇌의 전체를 이른바 ‘스캔’하지는 않기 때문에 ‘네’ 또는 ‘아니오’ 두 종류의 대답을 거의 같은 스피드로 할 수 있다. <출처 : gettyimages>

이러한 메타인지는 자신의 인지적 활동에 대한 지식과 조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내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에 대해 아는 것에서부터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계획과 그 계획의 실행과정을 평가하는 것에 이르는 전반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메타인지적 지식(metacognitive knowledge)은 무언가를 배우거나 실행할 때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다. <출처:corbis>


자신의 사고과정 전반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수행하거나 배우는 과정에서 어떠한 구체적 활동과 능력이 필요한지를 알고, 이에 기초해서 효과적인 전략을 선택하여 적절히 사용할 수 있다.

방금 전 언급한 바와 같이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구성 요소(즉, 지식과 조절)가 있는데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메타인지적 지식(metacognitive knowledge)이다. 이는 무언가를 배우거나 실행할 때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예를 들어, 수학시험 공부를 하면서 순열조합은 잘 알고 있는데 이항정리 부분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면 이 지식을 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식이 없는 경우 우리는 실생활에서 잘 알고 있는 부분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것이다. 둘째는 메타인지적 기술(metacognitive skill)이다. 이는 메타인지적 지식에 기초하여 발휘되는 것으로, 예를 들어, 이항정리 부분을 잘 모른다는 것을 알 경우,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계속하여 볼지 아니면 여러 차례에 걸쳐 들여다볼지 등 전략을 사용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메타인지 능력의 향상? 왕도는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메타인지 능력은 어떻게 향상될 수 있을까? 가장 관심 가는 질문이면서도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다양한 방법들과 변수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제한된 본 공간에서는 간접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방법 하나를 논해보고자 한다. 다시 그 0.1%의 비밀로 돌아가 보자. 다양한 친구들이 다양한 질문거리를 이 친구들에게 가져오고 대부분의 경우 열심히 설명을 해주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즉, 이 친구들은 실제 생활에 ‘설명’이라는 행위를 자주 그리고 많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의 공부방에 보드를 달아놓고 중요한 부분을 공부한 뒤 부모님을 모셔놓고 그 내용을 설명하는 이른바 '선생님 놀이'를 하는 여학생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설명’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얼까?

인지심리학자들이 좋아하는 말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지식이 있다. 첫 번째는 내가 알고 있다는 느낌은 있는데 설명할 수는 없는 지식이고 두 번째는 내가 알고 있다는 느낌뿐만 아니라 남들에게 설명할 수도 있는 지식이다. 두 번째 지식만 진짜 지식이며 내가 쓸 수 있는 지식이다.” 중요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첫 번째 지식은 왜 지식이 아닐까?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자주 경험해서 친숙하기 때문에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인 것이다. 사실 우리는 실생활에서 자주 이런 경험을 한다. 예를 들어보자. 가족이 휴가 길에 올랐다. 그런데 가는 길에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멈춰 섰다. 남편이 차에서 내려 자동차 보닛(bonnet)을 자신 있게 열어본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멍하니 쳐다볼 뿐이다. 보다 못한 부인이 핀잔을 준다. 고치지도 못할 것을 무엇 하러 열어보느냐고 말이다. 그 남편은 보닛을 열어보기 전에는 왠지 문제점을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 일까? 그 차는 매일 봐왔기 때문에 ‘친숙’하기 때문이다. 그 내부를 이해해 본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지식이 있다. 첫 번째는 내가 알고 있다는 느낌은 있는데 설명할 수는 없는 지식이고 두 번째는 내가 알고 있다는 느낌뿐만 아니라 남들에게 설명할 수도 있는 지식이다. 두 번째 지식만 진짜 지식이며 내가 쓸 수 있는 지식이다. <출처: gettyimages>

적은 한 번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양변기, 냉장고, 세탁기 등 우리 주위의 무수히 많은 친숙한 물건들 혹은 장치들에 대해서 잘 아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그렇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 작동원리를 설명해 보라고 되물으면 사람들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또한 학창시절에 ‘자, 이만하면 충분하다’라고 생각한 뒤 시험을 보러 들어가서는 눈앞이 막막해 지거나 머리가 갑자기 텅 빈 것 같은 경험을 한 분들도 첫 번째 종류의 지식만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미국 카네기 멜론 대학 심리학과의 Lynne M. Reder 교수는 매우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제시해 준다. 이 연구에서 실험참가자들은 먼저 ‘23×15’와 ‘47+18’과 같은 여러 개의 사칙연산 과제를 풀었다. 그 다음 참가자들은 다음과 같은 지시문을 받았다. “자, 지금까지는 연습시행입니다.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문제를 풀어봅시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각 문제를 풀 때마다 그 전에 A와 B 두 가지 중 하나의 옵션을 재빨리(통상 1~3초 내의 짧은 시간만을 준다.) 선택하고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옵션 A를 선택하면 빠른 시간 내에 답을 구하고 정답을 맞추면 50포인트를 받습니다. 하지만 옵션 B를 선택하면 여유 있게 답을 구하고 정답일 경우 5포인트를 받습니다.”

더하기 형태의 문제를 통해서 친숙해졌던 숫자에 대해 곱하기 형태로 제시되면 전혀 다른 문제임을 간과하는 등 우리는 메타인지의 판단 착오로 인한 오류를 종종 범한다. <출처: gettyimages>


이런 전제조건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상식적으로 문제가 쉽다고 판단한 경우에는 옵션 A를 선택한 뒤 문제를 풀 것이고 어렵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옵션 B를 선택하여 문제를 풀 것이다. 예를 들어 47+18이 나오면 옵션 A를 23×15이 제시되면 옵션 B를 선택하는 것이 적절한 옵션 선택방식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함정이 하나 숨어 있었다. 사전에 연습을 할 때 예를 들어, “47+18”을 주기적으로 문제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난 뒤 이 문제를 다시금 옵션을 선택하면서 문제를 푸는 본 시행에도 제시하였다. 결과는 매우 재미있었다. 사람들은 19×35와 같이 사전연습시행에서 본 적이 없는 문제에는 당연히 옵션 B를 선택하고 문제를 풀었다. 그런데 47×18과 같은 문제에는 옵션 A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시간이 더 필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왜일까? 47과 18이라는 두 숫자를 사전에 자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숫자는 더하기 형태의 문제를 통해서 친숙해졌던 것일 뿐 곱하기 형태로 제시되면 전혀 다른 문제임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메타인지의 판단 착오로 인한 오류를 종종 범한다.

그렇다면 설명은 어떤 과정을 포함하는가? 그 핵심에는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그 대상에 대한 본질적 이해에 있다. 즉, 이해가 수반되지 않으면 설명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설명을 해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부분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터디 그룹에서 최대의 수혜자는 열심히 발표 준비를 해 와서 남들에게 설명해 주는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설명을 듣는 사람이 결코 아니고 말이다. 또한 설명을 하려면 “아, 이건 이래서 그런 거구나.”라는 느낌이 들 정도까지 이해를 해야 하며 그런 느낌은 기억에도 정말 오래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설명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눈이 아닌 입이다. 입을 열어서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다면 나 자신에게라도 설명을 해보아야 한다. 내가 실제로 모르고 있는 것들이 일목요연하게 발견이 되며 무엇을 해야 할 지도 자연스럽게 정리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매우 유용하지만 간혹 우리 자신을 기만할 수도 있는 메타인지라는 눈을 정확하게 만들 수 있다. 메타인지는 그야말로 ‘느낌’을 결정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1. Flavell, J. H. (1979). Metacognition and cognitive monitoring. American Psychologist, 34, 906-911.
  2. Reder, L. M. & Ritter, F. E. (1992). What determines initial feeling of knowing? Familiarity with question terms, not with the answer.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Learning, Memory, and Cognition, 18, 435–451.

김경일 /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고려대학교에서 심리학 석사를 받았으며 미국 University of Texas - Austin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국제학술논문지에 Preference and the specificity of goals (2007), Self-construal and the processing of covariation information in causal reasoning (2007) 등을 발표하였다.


발행일
2011.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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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탠스
배움블로그2011. 8. 24.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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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경험주의자들 중에서 철학적으로 가장 깊은 영향을 남긴 데이비드 흄(David Hume, 원래는 Home)은 1711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Edinburgh)에서 태어났다. 에든버러는 1708년 잉글랜드에 병합되기 전까지 왕국 스코틀랜드의 수도였으며, 흄과 교우관계를 맺었던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활동하던 곳으로서, 흔히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본거지로 알려진 아름다운 도시다.

흄은 어린 시절부터 문학, 역사 그리고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철학책을 탐독하면서 12세가 되기 전(10세라는 설도 있다!), 형을 따라 에든버러 대학에 들어갈 정도로 인문학적 소질이 뛰어났었다. 집에서는 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흄은 철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였다. 그의 주저 중의 하나인 [인간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 3권은 1734~1737년 프랑스에 체류 중 준비하여, 영국에 돌아와 1739~1740년에 출판하였다. 흄은 자신의 주저를 불과 23살에 시작하여 29살에 끝낸 것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책을 출판하였다는 것보다 철학의 거인 칸트를 ‘도그마의 잠’에서 깨우고, 이후 과학철학의 시초, 논리실증주의의 원형으로 알려진, 지식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하였다는 점이 더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흄은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사고의 새로운 장’이 그에게 열렸다고 믿으면서, 기존의 철학이 갖고 있는 문제점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판단력이 있는 배운 사람이라면 최고의 신뢰를 받으면서, 정확하고 심오한 추론이라고 자부하는 체계가 얼마나 허약한 기초에 놓여 있는지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단지 믿음에 기초한 원칙들, 이로부터 서투르게 끌어낸 결론들, 정합성이 부족한 부분들, 확실성이 결여된 전체 등은 가장 저명한 철학자의 체계 여기저기에서 접할 수 있으며, 철학 자체를 불명예스럽게 만들고 있다. ([인간본성론] 서문)

철학자의 윤리가 근거 없는 주장의 비판과 정당화의 시도에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올바른 지식이란 과연 무엇인가?’는 실로 오래된 철학의 주제에 속한다. 그렇다면 흄이 비판의 칼을 갈아서 새로운 철학의 장을 열겠다고 했을 때, 그는 어떤 원칙에서 출발하였을까?

인간에 대한 과학이 다른 과학의 유일하고 견고한 토대가 되듯이, 인간에 대한 과학에 우리가 부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견고한 토대는 경험과 관찰에 근거해야 한다.

흄은 경험을 지식의 유일한 토대라고 보는 경험주의의 입장에서, 바로 인간의 경험에 필수적이라 보이는 귀납논증과 인과관계의 필연성이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점을 보일 수 있었다. 우선 ‘귀납논증의 문제(problem of induction)’라고 알려진 것부터 살펴보자.



18세기,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모습. <출처: wikipedia>

흄에 의하면 귀납논증은 ‘관찰된 사실로부터 관찰되지 않은 사태의 추론’을 의미하며, 그것은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감각과 기억을 넘어서는 행위’라고 비판한다. 감각과 감각의 기록을 의미하는 기억, 즉 경험의 뒷받침이 없는 지식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경험주의자라면 응당 귀납논증의 정당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귀납추론이 갖고 있는 중요성이다. 지금은 과학의 방법론을 꼭 귀납논증에서 찾고 있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자연과학이란 제한된 실험과 관찰을 통해 일반적인 자연법칙을 발견하는 귀납논증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자연과학이 자연의 진리를 발견하는 유일한 통로임에도 불구하고 귀납논증의 정당성이 부정된다면, 인간은 ‘원칙적으로’ 자연의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결론을 피할 수가 없다. 따라서 흄이 귀납논증을 비판한 이래 지금까지 거의 300년 동안 수많은 철학자와 논리학자들이 귀납논증에 연역논증이 갖는 수준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를 하여왔음은 물론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시도가 예외 없이 항상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거지논법(begging the question) 즉 순환논증에 빠지고 만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자연과학이란 제한된 실험과 관찰을 통해 일반적인 자연법칙을 발견하는 귀납논증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출처: NGD>


귀납논증을 구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자연이 지금까지의 진행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한다는, 이른바 ‘자연의 제일성(齊一性, uniformity of nature)’을 가정하는 것이다. 자연의 제일성을 귀납논증에 추가한다면 쉽게 그 정당화가 가능하다. 문제는 자연의 제일성이란 바로 귀납논증의 정당성과 내용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이다.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귀납논증을 경험주의의 입장에서 정당화하려는 또 다른 시도는 귀납논증이 잘 작동하고 있다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경험이 바로 귀납논증을 포함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귀납논증으로 귀납논증을 정당화한다는, 즉 ‘대상과 수단의 동일성’으로 인해 이 시도 역시 원위치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동양의 속담에 ‘손가락이 모든 것을 가리켜도 자신을 가리키지는 못한다’는 방법론적 순환에 대한 경고가 여기에 적용될 수 있다.

결국 ‘매일 새벽 6시 종이 울리면 먹이를 받아먹게 되자, 귀납논증을 통해 ‘새벽 6시 종 → 식사시간’이라는 결론을 내린 천재 칠면조가 어느 날 새벽 6시 종이 울리자 먹이를 받는 대신 목이 잘렸다’는 러셀식 우스개가 현재 귀납논증의 상황을 말해 주고 있는 셈이다. 바꿔 말해 흄에 의하면 관찰된 규칙성(regularity)만으로는 귀납논증을 정당화 할 수 없으며, 귀납논증은 다만 인간의 마음이 형성하는 습관(custom)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귀납논증의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인과관계의 필연성에 대한 흄의 비판이다. 여기서 흄이 말하는 경험의 내용을 약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흄에 의하면 인간이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세계를 경험할 때, 우선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인상(impression)을 받게 된다. 이 인상은 직접적인 만큼 강렬하고 생동적이다. 다른 한편 인상은 인간의 마음속에 관념(idea)을 남기게 되는데, 이 관념은 인상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흐릿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인과관계가 원인(cause)이라는 사건유형(e vent type)과 결과(effect)라는 사건유형과의 관계라는 점, 그리고 원인이 선행하고 결과가 후행한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보고 흄의 비판을 살펴보자. 우선 흄은 인과관계를 인간이 결코 선험적(a priori)으로, 즉 인상들의 논리적 포함관계로부터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한다. 실제로 어떤 신약이 특정 질병에 효과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논리학자가 아니라 임상의학자이다. 즉 경험에 의해서 인과관계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떤 사건유형을 다른 사건유형의 원인이라고 간주하더라도 원인에 이어 결과가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함축한다. 한 마디로 인과관계의 파악에 있어서 두 사건유형을 우리는 서로 독립적인 존재로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처럼 독립적인 존재들 간의 관계를 ‘외재적(external)’이라고 불렀으며, 인과관계는 이런 점에서 외재적 관계다.)

인과관계를 추정하기 위한 조건은 반복을 의미하는 규칙성이지만, 여기서 인과관계의 필연성은 논리적으로 확보가 불가능하다. <출처: NGD>

추론이 아니라면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관찰, 즉 경험에 의거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인과관계를 직접 관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의 시간적 양상에 의해 원인이 존재할 때는 결과가 없고, 결과가 존재할 때는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과관계를 두 사건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상상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추론에 의해서도 관찰에 의해서도 아니라면, 도대체 인간은 인과관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흄의 결론은 귀납논증의 경우처럼 습관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즉 특정한 사건에 이어서 또 다른 특정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반복되면, 우리의 마음은 습관적으로 이 두 사건의 유형으로부터 받는 인상들과 이에 상응하는 관념들을 결합하여(associate), 즉 투사(projection)하여 인과관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흄의 비판이 있기 전까지는 인과관계는 필연적 연결(necessary connection)로 간주되었지만 이제 인과관계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한편 인과관계의 필연성을 확보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인과관계를 개별사건(event token) 간의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다. 인과관계를 추정하기 위한 조건은 비슷한 사건들의 반복을 의미하는 규칙성이지만, 이 경우 인과관계의 필연성은 논리적으로 확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인과관계가 단순히 반복에 의한 규칙성과 다르다는 점에서, 즉 원인이란 인과력(causal power)을 갖는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런 경우는 어떤 비판이 가능할까?

개별사건간의 인과관계란 오로지 사후에만 판단된다는 점에서 두 사건이란 실은 하나의 사건을 분할한 것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때 확보된 필연성은 두 사건이 다시는 반복될 수 없다는 점에서 독립성의 상실에 기인한다. 파르메니데스적 일자(一者, the Oneness)가 돌아온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전체의 분할에서 생기는 상호의존적, 필연적 관계를 ‘내재적(internal)’ 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흄의 귀납논증과 인과관계의 필연성 비판은 칸트에게 ‘지식의 원천은 오로지 경험에 있을 뿐이지만, 경험이 곧바로 지식은 아니다’라는, 이른바 철학의 인식론적 전회(轉回)를 가져왔으며, 형이상학을 배제하고 인간의 지식체계를 경험의 의한 검증가능성에 기초하려는 20세기 논리실증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러나 생전에는 철학자로서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영국의 역사(History of England)] 6권을 지은 역사가로서 더 알려진, 그리고 대학에는 한 번도 자리를 얻지 못한 ‘흄의 회의’에 대한 구조적 이해는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흄의 인과관계의 필연성 비판은 구조적으로 볼 때 사실 인과관계에만 국한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비판의 핵심을 조금 더 일반화시키면 ‘독립적으로 도입된 어떤 존재들 간에도 필연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두 존재간의 필연성 확보란 사실 ‘하나의 존재를 두 부분으로 분할하여 경계를 그었지만 두 부분이 만나고 있다’는 것과 동일하다.(파르메니데스의 귀환!) 다빈치의 물과 공기의 경계, 연속개념, 극한, 무한소의 이중성, 인과관계의 필연성 비판 등은 어쩌면 동일한 구조적 문제에서 출발하는 친족들일 가능성이 있다.

  1. 귀납논증

    귀납논증(inductive argument)를 흔히 개별명제로부터 일반명제를 끌어내는 추론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귀납논증의 한 예일 뿐이다. 귀납논증은 연역논증(deductive argument)과 대비하여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논증이란 전제들로부터 결론을 끌어내는 행위이며, 이때 전제들이 모두 참일 경우 결론도 ‘반드시’ 참인 논증을 연역논증이라고 하며, 전제들이 모두 참이더라도 결론이 참이 아닐 수 있는 논증, 혹은 ‘아마도’ 참일 수 있는 논증을 귀납논증이라고 한다. 따라서 연역논증이 진리보존적이나 지식비확장적인 반면에, 귀납논증은 진리비보존적이나 지식확장적인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여론조사나 유비추리는 귀납논증에 속한다. 참고로 수학적 귀납법(mathematical induction)은 그 명칭과는 달리 연역논증에 속한다.

  2. 인식론적 전회

    인식론적 전회(epistemological turn)란 서양철학사에서 철학의 주요 관심이 존재론 즉 형이상학으로부터 인간이 획득한 지식의 본질로 크게 바뀌는 것을 말한다. 즉 고대와 중세를 지배했던 실재론(realism)에 대하여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그 실재성을 확보하려고 했던 데카르트의 『성찰』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지식 중에 선험적(a priori) 가능성을 천명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획을 그은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인식론적 전회를 통해 과거 존재론과 인식론의 구별이 근거 없음이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존재론과 인식론의 등가성에 대하여는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홍성기 / 아주대 기초교육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대학교 철학과 석사, 자르란트대학교 철학과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현 아주대학교 기초교육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용수의 논리], [불교와 분석철학], [시간과 경계], [고전 논리학과 대화 논리학]이 있다.

발행일 2010.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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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탠스
배움블로그2011. 8. 23.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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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현대의 시각문화를 지탱하는 미디어, 자연과 세계를 이해하는 창구, 나아가 일상적인 소통의 도구이다. 사진의 의미를 넓게 보면 카메라로 촬영된 영화, 비디오, 3D영상 등 모든 실물을 찍은 영상이 포함된다.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은 카메라 기능이 있는 휴대폰으로 언제 어디서든 사진을 찍어 기록한다. 뿐만 아니라 우주에 띄워 놓은 인공위성을 비롯해 건물과 거리 곳곳에 설치돼 있는 CCTV가 24시간 작동하면서 세상 곳곳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사진은 자신과 이웃, 세상과 자연의 모습을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중요한 수단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이와 같은 현대의 영상문화는 19세기 사진술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됐다.

손대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기술, 사진술의 탄생.

사진술의 탄생배경


사진술이 탄생하기 이전에 사물의 이미지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림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미술은 대부분 사물에 담긴 속성이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대개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神)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만들어 그 자체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그런데 1820년대 이후 유럽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 재현하려는 ‘사실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그림에서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능력을 중요시하게 됐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사물의 이미지를 가장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기술로 탄생한 것이 ‘사진’이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만든 광학장치인 '카메라 옵스큐라'. <출처: (CC) Meggar at wikipedia.org>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해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작가의 모습(18세기).

사진술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에 맺힌 일시적인 영상을 고정시키는 기술’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라틴어로 ‘어두운 방’이란 뜻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만든 광학장치이며 천여 년 전부터 그 원리가 알려져 천문관측 등에 이용됐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쓴 원고 중에는 ‘만약 어두운 방 벽에 조그맣고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으면 그 벽 바깥 풍경이 구멍으로 들어와 맞은 벽에 거꾸로 비칠 것이다. 구멍이 여러 개라면 각각의 구멍마다 같은 결과가 생길 것’이라는 내용도 적혀 있다. 17세기엔 이 영상을 손으로 베껴 그릴 수 있도록 만든 ‘실물사생기’가 발명돼 사용되기도 했다.

이 영상을 그대로 고정시키려면 빛 에너지를 화학적으로 바꾸는 기술이 필요했다. 17~18세기 연금술사와 물리학자는 초산은과 염산은 위에 레이스, 나뭇잎, 곤충의 날개 등을 올려놓고 빛에 노출시키면 그 모양이 그대로 남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초산은염화은은 빛에 노출되는 정도에 따라 검게 변하는 성질을 갖고 있어 물체를 올려놓으면 그 모양대로 그림이 나타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이 원리는 영상을 고정시키는 데 쓰이지 못했다. 또한 빛에 오래 노출시키면 그림이 사라져 버리는 문제점도 갖고 있었다.

손 대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기술 탄생


사진술은 과학적인 목적이 아닌 ‘손을 대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사람들’에 의해 탄생했다. '사진의 아버지'로 프랑스의 조세프 니에프스(Niepce, Joseph Nicephore, 1765~1833)와 루이 다게르(Louis Jacques MandéDaguerre, 1787~1851), 영국의 윌리엄 톨벗(William Henry Fox Talbot, 1800~1877) 세 사람을 들 수 있다. 공학자였던 니에프스는 아스팔트건판을 이용해 카메라 옵스큐라 이미지를 고정시키는 방법을 연구해 1826년 세계 최초로 사진을 제작했다. 노출시간이 8시간이나 걸린 이 사진은 '헬리오그래피(Heliography, 태양으로 그리는 그림)'라 불렸다.

1826년 니에프스가 제작한 ‘태양으로 그린 그림’ 사진.

오페라 무대장치가이자 디오라마의 발명자, 화가이기도 했던 다게르는 니에프스의 연구를 흡수해 실험을 거듭했다. 그는 요오드와 수은을 섞은 감광판을 사용했다. 여기에 식염을 넣어 니에프스의 사진보다 안정적이고 감광시간이 훨씬 단축된 사진을 만들었다. 이 기술은 1839년 8월 19일 '다게레오타입'(Daguereotype, 은판사진법)이라는 이름으로 공개됐고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서 공식적인 최초의 사진술로 인정받게 됐다.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서 공식적인 최초의 사진술로 인정한 ‘다게레오타입’.

한편 수학·물리학자이면서 아마추어 화가였던 톨벗은 초산은과 식염으로 만든 감광제를 바른 종이 위에 나뭇잎을 올려놓고 감광시키는 실험을 했다. 1837년 나뭇잎 형태를 이미지로 남기는 실험에 성공해 이 기술을 ‘톨벗 타입(talbotype)’이라 불렀다. 그는 ‘현상’의 과정을 확립하고 대량으로 사진을 출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개척한 사람으로 평가 받고 있다.

초창기 사진은 미술의 한 방법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회화와 비교되는 일이 많았고 회화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1870년대에는 말이 달리는 모습, 인간의 걷는 모습 등을 연속으로 촬영한 사진과 눈으로 본 장면의 차이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의 눈은 대상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인간은 대상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오는 빛을 보는 것이라는 ‘시각의 현실성’에 대한 자각은 인상파의 탄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디지털 시대, 인류에게 사진이란?


사진술 탄생 초기의 사진은 빛에 노출시키는 시간이 길어서 인물사진 한 장 찍으려면 수십 분 이상 카메라 앞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했다. 그 후 사진술 개발이 계속돼 현재는 1초에 수백만 장까지 촬영할 수 있게 됐다. 또한 다게레오타입으로는 촬영과 현상을 거쳐 단 한 장의 사진밖에 얻을 수 없었지만 1880년대 들어서며 롤 필름을 이용해 자유롭게 사진을 확대, 축소하거나 대량복제를 하는것도 가능해졌다.

현대에는 이전의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누구나 촬영, 저장, 가공, 전송, 출력을 간편하게 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사진이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순식간에 확산되는 것은 물론 최근에는 카메라에 부착된 GPS수신기로 사진을 찍은 위치정보까지 기록할 수 있다. 머지않아 특정 장소에서 촬영한 인터넷 상의 모든 사진을 자동적으로 검색하는 일까지 가능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술의 발달사.

우리는 사진을 통해 멀리 우주의 바깥에서부터 세포의 내부, 전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까지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또한 사진은 개인의 추억을 보존하고 역사적 사건의 현장을 가장 객관적으로 전달해 주기도 한다. 인간에게 사진은 기억을 위한 매체이고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눈이다.

  1. 연금술사(The alchemist)

    값싼 금속을 금과 같은 귀금속으로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

  2. 초산은(硝酸銀)

    질산은, 은을 질산에 녹여 증발시켜 얻는 무색 투명한 판 모양의 결정..

  3. 염화은(鹽化銀)

    염소와 은의 화합물.

  4. 아스팔트 건판(Asphalt plate)

    주석과 납의 합금인 퓨터판에 아스팔트를 바른 것. 라벤더 기름에 담그면 빛을 받은 부분은 굳고 빛을 받지 않은 부분은 녹은 모양이 생김.

  5. 디오라마(Diorama)

    배경이나 환경을 그림으로 하고 그 앞에 축소 모형을 설치해 하나의 장면을 만든 것.

  6. 감광(感光)

    빛을 쪼였을 때 물리적, 화학적으로 반응을 일으키는 현상.

  7. 인상파(Impressionism art)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상의 주의.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 움직이는 색채의 변화를 표현하고자 함.

이원곤 / 단국대학교 예술학과 교수

자료제공 사이언스올

이미지 getty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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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블로그2011. 8. 17.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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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은 소비되거나 저축된다. 개인이나 사회가 소득을 소비와 저축에 어떻게 배분하는지에 대한 탐구는 경제학자들의 주된 관심거리였다. 소비에 영향을 주는 변수는 무엇이고, 각 변수들이 소비에 주는 영향의 크기와 방향이 어떤 것인지를 나타내는 함수가 소비함수이다.

케인스의 절대소득가설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세이의 법칙에 따라 총수요는 항시 충분하다고 간주했기 때문에 총체적인 소비행태 보다는 미시적인 관점에서의 개인 소비행태만을 분석했다. 케인스는 세이의 법칙에 동의하지 않고 총수요가 부족하면 경기는 불황이 되고 비자발적 실업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불황의 원인을 총수요의 부족으로 간주한 케인스로서는 총수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문인 소비행태의 분석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케인스는 총체적 소비행태를 심리적인 면에서 찾았다. 그는 소비와 소득의 연계가 ‘기본적인 심리적 법칙(fundamental psychological law)’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소득 수준에 따라서 관습적으로 소비하는 수준 또는 생활수준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케인스에 따르면 소비행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의 특징은 소득이 증가했을 경우에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소비도 늘리지만 증가된 소득 전부를 소비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소득 증가분에 따른 소비의 증가분을 한계소비성향이라고 한다. 케인스에 따르면 ‘0<한계소비성향<1’이다.

소득이 없더라도 사람은 생존에 필요한 소비 지출이 필요하다. 케인스가 지적한 소비의 또 다른 특징이다. 소득 대비 소비수준(=소비/소득)은 평균소비성향이다. 소득이 없더라도 소비가 필요하다면 소득수준의 증가에 따라 평균소비성향은 감소한다. 고소득층의 평균소비성향은 저소득층의 평균소비성향보다 낮다. 즉 소득이 낮은 서민들은 벌은 돈으로 저축은 고사하고 쓰기에 급급한 반면에 소득이 높은 사람들은 쓰고 남는 돈이 많다는 얘기이다.


소비는 소득의 절대적인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던 경제학자 케인스. <출처:Wikipedia>

케인스가 본 소비함수는 결국 소비는 소득의 절대적인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를 절대소득가설(absolute income hypothesis)이라고 한다. 케인스의 절대소득가설이 실제로 현실의 소비행태와 부합되는지에 대해서 많은 검증이 뒤따랐다.

소비함수 퍼즐


초기의 실증분석은 주로 횡단면 자료를 사용했다. 즉 일정한 시점에서 소득 수준에 따른 소비 행태가 분석된 것이다. 여기에서 일정한 시점은 특정한 시점뿐만 아니라 하나의 경기주기도 포함된다. 특정한 시점에서의 개별 가계나 국가의 소비 행태는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소비가 감소(평균소비성향의 감소)하는 형태를 나타냈고, 한계소비성향은 0.6과 0.8 사이의 값으로 추정되었다. 이러한 추정 결과는 케인스가 설명한 소비행태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계열 자료를 사용하여 총소비와 총소득의 관계를 분석한 결과는 특정한 시점에서 개별 가계의 소득과 소비의 관계를 분석한 횡단면 분석의 추정 결과와는 다르게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쿠즈네츠(Simon Kuznets)가 1869-1938년 사이의 장기간 시계열 자료를 사용하여 총소득과 총소비 사이의 관계를 실증적으로 추정한 결과는 평균소비성향이 소득수준과는 무관하게 일정하고, 한계소비성향이 0.9로 추정했다. 이러한 결과는 개인이나 개별가계를 대상으로 소비와 소득의 관계를 횡단면 자료를 사용하여 추정한 결과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즉 시계열 자료에 의한 추정 결과는 케인스의 소비함수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소비함수 이론]에서 소비함수에 대한 케인스의 개념이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한 프리드먼. <출처: Phoebe Wong at en.wikipedia.org>


장기간의 시계열 자료를 사용하여 소비함수를 추정한 결과가 한 시점의 횡단면 자료를 사용하여 추정한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 현상은 경제학자들에게는 풀어야 할 하나의 중요한 수수께끼(puzzle)로 대두되었다.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시계열 자료를 사용하여 추정한 장기적인 소비행태가 횡단면 자료를 사용하여 추정한 단기적 소비행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케인스의 소비 이론 더 나아가서는 그의 [일반 이론]이 불완전하거나 오류가 있을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은 1957년에 간행된 그의 저서 [소비함수 이론]에서 이러한 불일치가 소비함수에 대한 케인스의 개념이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둘째로 한계소비성향의 크기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정책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계소비성향의 크기는 케인스의 [일반이론]의 정책적 함의성인 승수효과의 크기를 결정한다. 즉 한계소비성향이 작으면 승수효과가 감소한다. 따라서 낮은 한계소비성향은 국민소득을 증가시키기 위한 재정정책의 효과를 감소시키거나 재정지출의 규모를 확대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추정된 한계소비성향의 값이 횡단면 자료의 결과가 시계열 자료에 비해서 작게 나온 현상에 대한 정확한 규명은 정책 적용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소비함수논쟁


쿠즈네츠의 연구가 발표된 이후 시계열 자료의 추정 결과가 횡단자료의 추정 결과와 다르게 나타난 점에 대한 이론적 설명이 제시되었다. 대표적인 연구로는 듀젠베리(James S. Duesenberry)의 상대소득가설(relative income hypothesis), 모딜리아니(Franco Modigliani)의 생애주기가설, 프리드먼의 항상소득가설(permanent income hypothesis) 등이 있다. 이를 소비함수논쟁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론적 연구는 소비자의 소비행태와 소득의 정의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했다. 듀젠베리는 소비행태가 불가역적이고, 주위의 다른 사람의 소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소비행태는 주위 사람의 소비수준과 맞추거나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과시적 욕망에 따라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부자들 사이에 끼여서 사는 사람은 자신의 소득에 비해 소비수준이 높은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베블런(Thorstein Veblen)이 얘기하는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와 맥락을 함께 한다. 따라서 소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절대적인 소득수준이 아니라 자신의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의 소득수준에 대비한 상대적인 소득인 것이다.

상대소득은 자신의 과거 소득수준에 대비한 현재의 소득수준으로도 정의할 수 있다. 소비자들의 소비행태는 일반적으로 소비해오던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습성의 지속이다. 즉 소비자들은 소득이 증가하는 경우에도 소비는 소득 증가 이전의 수준을 당분간 그대로 유지한다. 소득의 불가역성이다. 이는 마치 한 번 상승하면 본래 상태로 다시 내려오기 어려운 톱니바퀴(rachet)와 같은 현상이다. 따라서 단기간에는 저소득층 가운데 종전에 소득이 높았던 가구의 소비는 높아지므로 저소득층의 평균소비성향은 높다. 반대로 소득이 감소하는 경우에는 소득 감소 이전의 소비 수준을 당분간 그대로 유지한다. 따라서 저소득층의 소비는 단기간에는 높아지므로 평균소비성향이 높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새로운 소득 수준에 맞추어 소비를 조정한다. 따라서 장기에는 평균소비성향이 소득수준과는 무관하게 일정하다. 장기간의 시계열 자료를 사용해서 추정한 평균소비성향이 일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비함수 이론은 소비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이론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출처:Gettyimages>

소비함수 이론은 소비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이론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생애주기가설이나 항상소득가설은 소비자의 연령이나 가족의 수가 소비수준 결정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변수이고, 상대소득가설은 소비자의 가족배경이나 학력 소득분배 등이 중요한 변수임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소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소득수준, 이자율, 소득분배상태와 같은 경제적 요인 뿐 만 아니라 가족 배경, 종교, 교육, 광고에 의한 세뇌 등과 같은 인습적이고 문화적인 요인도 포함된다.

참고문헌: David Bunting, "The Consumption function "paradox"," [Journal of Post Keynesian Economics, 1989]; James Tobin, Consumption Function, Cowles Foundation Paper 281.

  1. 시계열 분석과 횡단면 분석의 추정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소득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의해서 설명하는 접근법은 모딜리아니의 생애주기 가설과 프리드먼의 항상소비가설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이종화 신관호 공저 [거시경제학], (박영사, 2009), 527-553쪽을 참고할 것.

김철환 / 아주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Santa Barbara)에서 경제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주요 저서로는 [즐거운 경제학], [환율이론과 국제수지] 등이 있다. 최근에 발표한 논문으로는 "Does Korea have Twin Deficits?" Applied Economics Letters, 2006; "Do Capital inflows Cause Current Account Deficts?" Applied Economics Letters, 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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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탠스
배움블로그2011. 8. 16.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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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참으며일하는사람은업적을남길수 없다.

일하는 것을 고통으로, 참아야 할 괴로움으로 여기는 사람 들은 커다란 성취를 이뤄내지 못한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하는 일에서 커다란 즐거움과 사명감과 의미를 찾 은 사람들이다. 보다 많은 연봉이나 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 자신이 하는 일을 ‘참으면서’ 하는 사람이 위대한 업적을 남 긴 예는 없다. -탈 벤 샤하르 (김주환 저, ‘회복 탄력성’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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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탠스
배움블로그2011. 7. 18.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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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과연 합리적인 존재인가? 심리학자로서 세상의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는 심리학보다 훨씬 더 긴 역사를 지닌 철학에서도 오랜 논쟁의 대상이 되어온 이슈이며 따라서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재미있는 건 대다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합리적인 측면보다는 그렇지 못한 부분에 더 관심이 많다는 점이다. 마치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님을 간접적으로 이야기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사실 많은 심리학 연구들은 '인간은 이래야 한다‘라는 것과 같은 당위성을 최대한 배제한 가운데 인간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편향(bias)들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 편향들의 결과는 때로는 오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매우 자연스럽게 우리의 판단과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편향에 관한 연구들은 다양한 영역에서 ‘판단과 의사결정’ 주제로 데이터들을 축적해 왔다. 그 결과는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대답방식에 일련의 변화를 만들었다. 초기 연구들이 주로 “인간이 왜 편향으로 인해 합리적이지 못하게 되는가”라는 다소 순진한 대답에 몰두했다면 이후의 본격적 연구들은 “인간은 어떤 편향들에 주로 합리적이지 못하게 되는가”라는 보다 가치 중립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인간이 정말 합리적일 필요가 있는가?”라든가 “합리성이라는 것이 정말 따를 가치가 있는 것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점을 지적하는 대답방식도 관심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판단하는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해 보자.

 

Linda는 28세의 독신 여성이다. 그녀는 몇 개의 여성 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특히, 학대로 고통을 받는 여성들을 위한 보호시설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으며, 낙태권리를 주장하는 시위와 행진에도 자주 참여하고 있다.
<출처: http://youarenotsosmart.com/2010/05/28/representative-heuristic/

 

위의 글을 들려준 뒤 사람들에게 "그녀가 은행원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라고 물어본다. 사람들은 그 확률이 그리 높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그녀가 페미니스트인 은행원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라고 물어본다. 이상하게도 이번엔 사람들이 그 확률이 더 높게 추정한다. 상식적으로 첫 번째의 확률이 두 번째의 확률보다 무조건 커야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식의 '비합리적'인 확률 판단을 하는 것일까? 답은 의외의 곳에 있다. 사람들은 확률 판단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을 판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사성(Similarity)이다. 즉,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Linda에 대한 묘사에 기초해 그녀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와 '은행원'인 Linda의 유사성을 판단 할 것이다. 이 둘 간의 유사성은 당연히 높지 않다. 하지만 '페미니스트인 Linda'와의 유사성이 상대적으로 더 높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상황과 시점에서 이른바 ‘확률’을 추정하곤 한다. 과연 우리는 정말 확률을 추정하고 있는 있을까? 곧 비가 올지 여부를 우리는 어떻게 가늠하는가? 하늘을 본다. 하늘이 잔뜩 흐리다면 오리는 비가 올 확률을 높게 추정한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우리가 한 일은 비와 흐린 날씨 간의 유사성을 판단한 것이다.

 

다시금 Linda의 예로 돌아가 보자. 사람들은 분명 ‘비합리적’ 확률 추정을 했다. 그렇다면 유사성을 중심으로 보면 어떤가? 그렇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Linda의 이미지는 페미니스트인 은행원과 더 유사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합리적이냐 아니냐는 절대적인 기준에 의해서 판단될 문제가 아니라 어떤 잣대를 가지고 인간의 판단을 그야말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문제로 봐야 할 것이다. 혹시 인간이 할 수 없거나 혹은 지킬 필요도 없는 기준을 설정해 놓고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과연 우리가 비합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심리학자들의 관심사는 명확해 진다.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위해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일까? 


인간은 무엇을 위해 그리고 언제 판단을 완성하는가?

 

일찍이 인간의 인지 능력이 지니는 한계점에 주목했던 인지과학자 사이먼. <출처: Wikipedia>


1978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의 거목 중 한 사람인 사이먼(Herbert A. Simon)은 일찍이 인간의 인지 능력이 지니는 한계점에 주목했다. 어떤 의사결정 상황이든 그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대안의 수는 매우 많을 것이다. 그러다 그 대안들 모두를 일일이 평가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인간의 인지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 역시 분명하다. 

 

따라서 모든 부분을 빈틈없이 고려해서 최적의 대안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그다지 현실적이지 못한 방법이다. 그보다는 자신이 만족하는 순간이나 수준에서 판단을 확정하고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작은 분식점의 주인이 아르바이트 학생을 한 명 채용하려고 한다고 가정을 해보자. 광고를 본 학생들이 계속해서 면접을 보러 온다. 5~6명 정도 만나본 후 주인이 이런 생각을 한다. “두 번째 온 여학생과 다섯 번째 온 남학생이 괜찮을 것 같은데? 둘 중에 누가 나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주인의 생각은 이제 나름대로 치밀해지기 시작한다. “두 번째 여학생은 상냥해서 손님들이 좋아할 것 같고 다섯 번째 남학생은 무거운 짐도 잘 나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래! 우리 가게는 매장이 넓지 않아 덩치가 큰 남학생은 일하기가 쉽지 않을 거야. 참! 그리고 손님들 앞에서 음식을 직접 볶아 주는 일도 해야 하니 이 여학생이 좋겠군.” 주인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순간 판단과 결정은 이루어진다. 그리고 더 이상의 면접은 없다. 만약 그 분식점 주인이

더 많은 학생들을 면접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더 괜찮은 후보자를 만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족스런 몇 개의 대안(즉, 여학생과 남학생)을 발견하는 순간 의사결정자는 일단 멈추고 그 대안들을 비교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합리적’인 사람인 양 치밀하게 그 대안들을 비교한다. 이를 사이먼은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최적의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만족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사이먼의 제한적 합리성 이론은 이후 그 유명한 아모스 트버스키(Amos Tversky)와 카너먼(Daniel Kahneman)의 프레임 효과(frame effect), 그리고 더 나아가 조망이론(prospect theory)을 탄생시키는 출발점이 된다. 또한 70년대 이후의 무수한 휴리스틱(heuristic) 연구들도 여기에 뿌리를 둔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별도의 공간에서 다루어야 할 방대한 내용이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이 합리적이지 못한 존재라기보다는 합리성 이외의 것을 더 중요하게 추구하는 존재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최적의 것 보다는 ‘후회를 제일 덜 할만한 것’을 선택하면서 더 만족감을 느낄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은 ‘가장 정당화하기 쉬운 것’을 선택하면서 더 만족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시대와 연령, 개인차 그리고 상황 등 다양한 요소들의 영향을 받거나 이들을 고려하면서 인간은 가장 만족스러운 것을 선택하기 원한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에게 ‘왜 사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대부분 ‘행복’을 위해 산다고 한다. 그리고 행복은 만족이라는 벽돌들로 지어진 하나의 집이다. 확률에 결과 값을 곱하여 계산되는 기대가치가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만족감을 주지 못하면 깡그리 무시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선택을 할 때 최적의 것 보다는 ‘후회를 제일 덜할만한 것’을 선택하면서 더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출처: NGD>

 

 

  1. Tversky, A. and Kahneman, D. (1983). Extensional vs. intuitive reasoning: The conjunction fallacy in probability judgment. Psychological Review, 90:293?315.

 

 

 

김경일 /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고려대학교에서 심리학 석사를 받았으며 미국 University of Texas - Austin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국제학술논문지에 Preference and the specificity of goals (2007), Self-construal and the processing of covariation information in causal reasoning (2007) 등을 발표하였다.


발행일
  2011.07.18

ps . 위의 글은 네이버 캐스트에 출처를 두고 있으며, 많은 분들이 신뢰성있고 재밋는 이야기를 알리고자 개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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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탠스
배움블로그2011. 7. 12.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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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중앙일보
"청년에게 실패할 자유 허하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6월 27일 제1회 중앙비즈니스 포럼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안 원장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문화가 발목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안철수(49)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세계적인 천재도 10개 아이디어 중 한 개만 성공시키는데, 우리는 천재 한 명이 아이디어 하나 냈다가 실패하면 매장당한다”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우리 사회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싹수 있는 사회일수록 리스크 테이킹(위험 감수)을 하지만 우리는 똑똑한 사람들이 이를 피한다”고 꼬집었다.

지난달 27일 서울 순화동 중앙일보 인력개발원에서 열린 ‘중앙비즈니스(JB) 포럼’에서다. 포럼은 중앙일보 산업부 기자들의 학술모임이다. 안 원장은 또 “이대로 가다간 삼성 같은 대기업도 망한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안 원장의 ‘대기업 패망론’은 전 세계에 불고 있는 정보기술(IT)기업 창업열풍에서 왜 한국만 비켜 있는지를 설명하는 도중 나왔다.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문화’가 한국이 경쟁국보다 먼저 치고 나가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는 데 발목을 잡고 있으며 삼성 같은 대기업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한국이 IT 창업 열풍과 괴리돼 있는 이유는.

 “네 가지다. ▶창업자의 실력 부족 ▶열악한 창업 인프라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 관행 ▶좀비(죽지 않고 살아있는 시체) 이코노미다(그는 좀비 이코노미 설명에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한국에서는 벤처투자가 부진하다 보니 대표이사가 연대보증으로 은행 빚을 얻어 사업을 시작하고, 사업이 부진해도 빚 때문에 접지 않는다. 그 대신 덤핑을 하고, 정부의 눈먼 돈을 지원받아 가며 일종의 ‘좀비 기업’이 돼 생명을 연명해 간다는 것이다).

 대기업들의 행태도 좀비 이코노미에 한몫한다. 괜찮은 벤처가 있으면 인수합병(M&A)을 해야 벤처투자자가 돈을 회수할 수 있는데, 그냥 그 기업과 독점계약을 맺고 소위 ‘삼성 동물원’ ‘LG동물원’ 식으로 동물원에 가두니까 벤처투자가 일어나지 않는다.”

 - 그래도 안 원장 창업 시절(안철수연구소 창업시점이 1995년)보다 여건이 좋은 것 아닌가.

 “사회 인센티브 시스템이 굉장히 나빠졌다. 젊은이들이 98년 외환위기 전에는 공대에 가려 했는데, 이젠 완전히 돌아섰다. 요즘은 똑똑한 사람들이 리스크를 더 감수하지 않고 안전지향적으로 간다. 50년 전에 우린 꼴찌에서 3등이었다. 그때 우리 생존방식은 가진 게 없으니 남들이 해놓은 거 열심히 쫓아가서 싹수가 있으면 올인했다. 그래서 성공했다.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전략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다. 중국이 우리보다 빠르기 때문에 이젠 퍼스트 무버가 돼야 한다.”

 -대기업이 퍼스트 무버가 되려면.

 “기업문화를 바꿔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불가능하다. 기업 생태계를 만들어서 벤처기업이 다양한 실험을 하게 하고, 그중에서 성공한 벤처를 인수하면 삼성전자도 혁신적인 기업이 된다. 대기업은 장기적인 생존을 위해 ‘동물원’을 만들지 않는 게 맞다.”

 -교수로서 무엇을 가르치나.

 “세상이 안 바뀌는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래서 창업을 권한다. KAIST 교수였을 때 한 학기당 세 명꼴로 창업했다. 교수가 돼서 제일 좋은 게 사람을 바꿀 수 있어서다.”

 -창업에서 성공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좋은 사람이 모여서, 좋은 제품을 만들고, 점진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혼자서 창업하기보다 두 명 이상이 창업하는 것이 성공확률이 훨씬 높다. 2~4명이 제일 좋다. 성공확률을 높이려면 창업자들의 만장일치가 좋은데, 사회학적으로 보면 5명부터는 그게 잘 안 된다.”

 -안 원장 자신은 창업 초기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냈나.

 “어느 날, 친구들은 다들 교수 하는데 나는 뭐 하고 있나 싶더라. 그런데 헤어나오는 노하우가 생겼다. 동기동창과 비교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위를 쳐다보면 힘들지만 아래를 보면 내가 회사를 만들어 매출도 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왼쪽)과 그룹 인터뷰를 하고 있는 중앙일보 산업부 기자들.


 -제일 어려웠던 점은.

 “사업 초기 직원들 월급 줄 길이 없어 은행 직원들에게 싹싹 빌어서 어음 깡(할인)을 해 마련했다. 그때 경험 때문인지 지금도 월 초만 되면 괜히 불안하다.”

 -어떤 인재를 선호하나.

 “사람을 뽑을 때 딱 하나만 본다. ‘나는 틀릴 수 있다(I may be wrong)’고 말하는 사람이 좋다. 다른 사항은 볼 필요도 없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신감을 갖고 있고, 다른 사람과 합의를 이뤄낼 수 있다. 실패 확률을 10분의 1로 낮출 수 있는 사람이다.”

 -한국 교육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나.

 “지금 한국 대학들은 교육기관이 아니라 공부기관이다. 목표가 연구성과에 집약돼 있다. 좋은 대학일수록 학생들을 방목한다. 학생 교육에 신경을 많이 쓰는 교수는 바보가 되고 있다. 대학이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아야 희망이 있다. 얼마 전 KAIST의 자살 사태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KAIST라는 조그만 창을 통해 터진 거다. 자살이 멈춘 것은 가족·친지들이 안부 묻고 관심 보이니까 그런 거다. 실질적인 조치가 없었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않고 학교에만 맡겨둬선 안 된다.”

 -정치참여 제의를 많이 받는다. 세상을 바꾸려면 참여해서 해야지 피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 아닌가.

 “정치는 체질에 안 맞는다. 내겐 권력 욕심이 없다.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쾌감이 아니고 짐이다. 괜찮은 분들이 (정치판에) 가서 그냥 나온다. 혼자서는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함께 바꿀 수 있으면 제일 좋은데 그런 때가 올까.”

 - 그냥 메시지만 던지겠다는 건가.

 “메시지도 던지지만, (그냥 메시지만 던지고 있자니) 화도 조금씩 나고 있다. 나 자신을 보면 정치인과 안 맞는 게 확실한데, 현실을 보고 있자니 점점 화가 난다.”

정리=권희진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안철수 대학원장은

▶1962년 부산 출생

▶86년 서울대 의대 졸업

▶95년 안철수연구소 설립

▶9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공학 석사

▶2008년 미국 와튼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2008년 5월~2011년 5월 KAIST 석좌교수

▶2011년 6월~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
 지난달 부산에서 열리는 청춘 콘서트라는 곳에 가게 되었다. 연사는 박경철,안철수,법륜스님,김제동 이 와서 방황하는 청춘에게 힘을 불어넣어주는 자리였다. 그곳에서 안철수씨의 강연을 듣게 되었고 중간에 이야기를 위의 기사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1. Fast Follower 와 First Mover
 과거 7080년대에는 우리는 급격한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그 속의 성장 동력을 찾아보면 선진국의 성장 모델을 따라 발전한 오늘날 대기업과 그 기어들의 전략에 맞춘 국민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공멸을 초래하는 도전보다는 안정적인 끼니를 얻을 수 있는 검증된 사업에 투자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성실과 근면이 가장 좋은 규범이자 황금률이 되었다. 
 그러나, 일등과 똑같이 해서는 앞지를 수 없다라는 것 처럼 우리는 이제 몇몇 분야에 있어서 선도를 하거나 2등 인 분야가 많아졌다. 그리고, KAIST나 사회 여러 분야에서 터지는 파이가 커지지 않으면 제살을 파먹는 광경을 많이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성장법이 인정 받아야 되지 않을까? 안철수씨는 이러한 성장법을 First Mover와 사회에서 멋진실패를 용인해주는 문화를 정착해야된다고 계속해서 역설 하고 있다.
 아이폰,금융상품을 비롯한 고부가가치 산업에서는 결국 수많은 실패 속에서 솟아나는 것들이었다.고부가가치를 남기지 못하면 성장은 정체될 수 밖에 없다면 우리도 제2의 아이폰, windows를 만들기 위해선 실패도 하나의 성장을 위한 성실한 행동으로 바라 봐야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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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탠스
배움블로그2011. 7. 11.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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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있는사람은인생을즐긴다.

스스로 세운 인생의 목표에 헌신하는 사람은

삶이 즐거워 어쩔 줄 모른다.

다시 태어나도 그 일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수입이 전혀 없어도 기꺼이 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일을 초등학교 때부터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혼다 겐(이강락, ‘청춘에게’에서 재인용)

꿈이 있는 사람은 인생을 즐깁니다.

어려움이 닥쳐도 기꺼이 과정으로 받아드립니다.

반면 꿈이 없는 사람은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남에게 맡긴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삶이 무미건조하다면,

꿈을 리모델링할 때가 된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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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