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레빈슨
경제학자 겸 저널리스트.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상세한 통계와 고증자료를 통해 유추하고 사실을 기록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마치 지금 주식시장과 금융시장에 여러 칼럼니스트, 블로거니스트, 전문가들이 떠들고 있는 'Code Green'이라는 테마 속에서 모두가 이용하지만 인지하지 못하는 무색무취한 아무 매력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창출된다고 저자는 말하려는 것 같다. 그가 말하려는 20세기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엄청난 과학에 발전에 기인한 나노공학, 유전자공학, 기계를 통한 공장자동화가 아닌 아주 멋대가리 없고 앞뒤가 막힌 커다란 직육면체 철강상자가 세계경제를 뒤흔들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통계, 신문, 회의자료, 논문, 책, 국제 에이전시 문서, 개인보고서, 정부 문서 등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는 조직적인 기반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을 무심결에 읽는 독자든 공부를 위해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가 주장하는 바가 현실적이고 실제로 컨테이너가 세계경제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크게 느끼게 한다.
-국제 표준, 이른바 ISO, Global Standard에 대한 고찰을 읽을 수 있었던 책
내가 사는 곳은 부산이다. 젊은 나이지만 부산에서 20년이라는 기간을 살면서 무심결에 만났던 컨테이너는 수없이 많다. 내가 1년전에 근무했던 부산지사에서도 사무실 앞을 나서면 부산항이 자리잡고 있어 컨테이너가 몇겹씩 쌓여 해안선을 끼고 병풍처럼 서있는 광경이 아직도 떠오른다. 그 창문을 바라보면서 이 많은 컨테이너 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왜 컨테이너에 옮겨서 올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적도 있었다.
이 책은 간단히 말해서 컨테이너라는 철강상자가 어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만들어지고도 상용화되고 세계로 뻣어나가게 되는 과정을 그린 책이다. 그리고 이러한 파급효과에 대해 세계경제가 어떻게 반응하고 운송이라는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많은 업종이 영향을 받게 되는지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거시적 흐름에 깔려진 말콤 멕린, 맥슨 과 같은 컨테이너의 창시자와 많은 운송회사들의 사업적 수완과 실패를 그려낸다. 그리고 저자는 지금의 경제학의 사조인 하이에크와 케인즈의 주장을 논박하는 내용도 깔려있다. 이러한 많은 사건과 논리적 흐름, 상황적 변화를 조리있고 혼돈스럽지 않고 깔끔하게 정리했던 책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시사점은 지금 컨테이너는 무역에 있어서 없어선 안되는 존재이고 이것이 통용되기 위해선 상호간에 정한 규격과 표준을 정했다는 것이다. 컨테이너를 넘어선 세계경제와 외적인 요소의 국제표준, Global Standard는 지금도 치열하고 숨가쁘게 이뤄지고 있다.
1. 강철박스가 만들어낸 신화
"컨테이너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다. 컨테이너란 딱딱한 알루미늄이나 강철이 용접과 이음새 과정을 거쳐 나무 화물깔판을 깔고 한쪽을 문 2개로 치장한 믿음직한 운송매체일 뿐이다. 거대하고 투박하게 생긴 박스는 귀여운 구석이라곤 한군데도 없다." p. 15
컨테이너가 전통적 경제를 무너뜨리기 전에 공장도 마을도 항구도시를 끼고 소도시 규모의 거점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컨테이너라는 하나의 투박한 물건이 들어오고 나면서 더이상 항구도시의 당위성은 사라지고 많은 공장들은 이른바 Out Sourcing이라는 핵심산업 집중, 부수산업 분산이라는 기치를 띄며 발전한다. 나는 이렇게 변화한 주거,산업의 패러다임은 오늘날에 많은 블로거니스트들과 칼럼니스트가 말하는 폐쇄무역으로의 전환, 세계무역의 급속한 감소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 컨테이너를 대체할 만한 자국경제를 활성화 할 수 있는 물건이 발명되지 않으면 선박, 해운, 운송을 아우르는 무역업 폐쇄 비용이 커보여서 무역경제에서 자국경제로 이양될 가능성은 미비하다라고 결론지었다. 즉, 세계가 거미줄 처럼 연결된 경제(Global Economy)가 지속될 기반(Fundamental)이 건재하다고 생각했다.-물론 내가 이러한 발명품을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세계 무역은 많은 칼럼니스트나, 블로거니스트들이 말하는 것처럼 빈익빈 부익부를 강화시키고 환경문제를 부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 무역이 무조껀 비관적이고 피해만 주는 것일까? 아니다. 소비자 편익이라는 커다란 선물이 있기에 보급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우리는 소비자이다. 라는 명제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또한 컨테이너는 세계화만 이뤄놓은 것은 아니다. 세계화 속에서도 동시에 복지국가의 기반을 만들어 놓았다. 이유는 북미와 서유럽, 일본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은 협상을 통해 임금과 복지 혜택을 지속적으로 높혔고, 정부당국도 이러한 요구에 부합해 강력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해주었다. 흔히 알고 있는 주당 노동시간 규제, 정년 퇴직의 연장은 컨테이너가 세계로 퍼져나가는 동안에 발생하였고 부두 노동자와 같은 패러다임에 의해 없어지는 업종에 종사한 사람들의 강한 주장에 의해 관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컨테이너가 첫번째로 영향을 미친 부분은 하역인부 급료 보험료, 부두 임대비등의 화물의 1차적 접촉자들의 인건비와 비용이 대폭 감소했다는 것이다. 제도권의 전문가들이 흔히 말하는 오늘날 BDI 지수와 같은 운임비용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세계무역의 감소와 같은 무역의 핵겨울을 말하는 것이 될 수도 있지만 해운업의 비용절감의 또다른 신호라는 해석이 가능한 것도 이러한 역사적 사례를 기반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해운화물요율이 급속히 떨어지면서 공장은 아시아에 소비는 북미 유럽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만드는 사람은 만들기만하고 먹는 사람은 먹기만 한다는 속담의 상황이 세계경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컨테이너와 컴퓨터의 조합은 일본이 자동차 강국이 되는 유용한 존재가 되었다. 제품을 만들고 싶을 때 원자재를 들여와 과거 창고에 원자재를 보관하면서 소비하는 재고비용의 절감을 하고 원료에서 완재품이 만들어지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가시화 하므로 보이지 않는 제품에 대한 회계를 계상할 필요가 없어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을 절약하고 시간을 맞추므로서 시장을 공략할 공급자의 힘이 생겼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의 말에 동의를 하지만 이 쯤 되었을 때 나의 머릿속에는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화물 운송비 절감이 세계경제를 연결시키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세계 경제가 단절되었을 땐 화물 운송비가 상승추세에 있었어야 명제의 대우가 성립한다. 역사적 사실에 고증하면 부두노동자와 항만업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들의 노동력이 없으면 무역이 되지 않는 것을 알아채고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1년에 13만노동시간을 파업으로 날려가면서 임금과 많은 요구를 해왔고 운송회사들은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수락해왔던 것으로 보아 화물 운송비가 자국 경제로의 무역을 해올 때는 상당히 비쌌고 계속해서 상승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계 경제에 컨테이너가 보급되고 활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개혁이었기 떄문이다. 흔히들 개혁과 마케팅에서 말하는 이노베이션(Innovation)은 페러다임을 바꿀만큼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하고 관심을 가지게 할 만큼의 강한 것을 개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의 편견은 잘못되었다. 자본주의 상의 개혁은 자본과 노동,토지 이 세가지의 생산의 기본요소가 경제에 성장과 번영에 영향을 미친다면 편견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케팅에서 알파를 만들기보다 오메가를 붙여라는 격언과 통용되는 말이다. 물론 무미건조한 신기술에 투자하는 사업가의 입장에서는 혹여나 자신이 투자한 섹터의 기술이 사양길에 접어들어 돈을 쏟아 붓는 행위는 위험 그 자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꾸로 말해서 모든 사업가가 그렇게 생각할 수록 위험에 노출 되는 것은 사람이 사는 사회현상에서 미래에 전략,전술 평가를 했을 때 올바른 행동이었음이 밝혀진다. 즉, 인간의 트랜드 지향적인 본능은 선사시대 이전의 생존의 문제가 부각되는 시기에는 아주 유용한 것이었지만, 인간의 뇌의 발달은 시대정신의 발달에 후행하는 성격을 가지므로 오히려 불이익이 되는 점이 많다. 다소 흥미로운 점은 운송비 하락 압력 요인 또한 이러한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이다. 과거의 총제조비 원가에서 운송비가 차지하게 되는 비율이 극단적으로 컸다. 그래프로 그려봤을 때 보기 싫을 정도로 튀어나온 운송비 영역은 많은 사람들에게 골치와 고뇌를 가져다 줬을 것으로 사료된다. 상당히 높은 운송비를 줄일 궁리를 하면서 컨테이너, 자동화 부두, 컨테이너 선, 컨테이너 규격의 필요성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상당히 높은 비용은 미래에 획기적인 비용절감의 영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컨테이너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환율구조의 변화, 반복되는 석유파동, 식민지 제도의 종식, 제트기 발명, 컴퓨터 보급의 확장, 장거리 고속도로 건설, 이 외에도 수많은 발명과 개혁들이 거듭되어 세계경제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p.33
단원을 마무리하며 위의 발췌한 내용을 정리하자면, 오늘날 컨테이너의 이동-속이 꽉차든 비어있든-은 각국의 무역관계와 직결 되기 떄문에 환율구조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한 컨테이너선의 긴 운송거리를 고려한다면 유가의 수요에 커다란 외생변수가 될 수 있다. 또한 컨테이너 이전에는 해외 교역에 따르는 비용 압박이 컷기 때문에 식민지와 같은 반강제적인 무역 루트를 개척해야만 그들의 공산품을 많은 이득을 남기고 팔 수 있었다. 제트기 발명은 해운,운송과 같은 극단적인 비용절감을 이뤄놓은 상태에서 더 빠르고 더 정확히 제조업체의 필요를 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또한 장거리 고속도로는 도로,항만에서 트럭이 가지는 단거리 운송의 장점을 극대화 하기위해 건설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컨테이너가 가지는 경제학적 유용성은 한번도 중요한 지표로나 학문의 가치를 인정받은 적이 없으므로 상당히 매력적인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다.
2. 정체된 부두
"1950년대 초반 '컨테이너'라는 단어가 사람들에게 깊이 인식되기도 전, 세계 주요국가들은 심장부에 부두 몇 개씩을 갖고 있었다. 화물운송 작업은 도로와 부두 사이에서 짐을 나르고, 끌고, 미는 사람들을 수백만명이나 동원하는 도시산업이라 할 수 잇었다. 부두에는 수많은 인부들이 벌뗴같이 몰려와 등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배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과, 짐칸 구석구석 적당한 곳에 박스며 자루를 쌓는 풍경들이 늘 연출되었따. 부두 근처에는 짐을 보관하는 창고들이 즐비했고, 창고가 없는 곳엔 어김없이 공장들이 서있었다. 오랜 세월 그래왔듯이, 제조업체들이 원자재를 쉽게 운반해와 완성된 제품을 신속히 내보낼 수 있도록 부두 근처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p.36
1950년대의 무역에 비중을 둔 산업은 한마디로 말해서 '운송지 집약적 산업'이다. 무겁고, 꺠지기 쉬운 것, 나르기 힘든 물건, 운송비의 영향을 많이 받는 산업이다. 반면 오늘날은 과거 무역과 상관 없는 부품산업까지도 무역에 영향을 받지만 항만주위에 군집하는 형태를 뛰진 않는다. 그리고 1950년대 까지 운송에서 중요한 테마는 '컨테이너'가 아닌 '브레이크 벌크'라는 용어이다. 브레이크 벌크는 유리,농작물,과일 처럼 쉽게 손상되어 신중하게 다뤄야 하는 예민한 화물을 말한다. 이것을 배에 실을 때는 인부들의 노련한 기술과 안전거리를 유지한 배의 선적이 필요하기 떄문이다. 오늘날 흔히 말하는 고부가 산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바다와 땅의 경제적 장벽이 컸다. 다르게 말해 인부들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배에 실을 수도 트럭에 실을 수도 없었다. 당시 크레인은 있었지만 인부들의 도움이 없으면 짐을 하나도 옮길 수 없을 정도 였다.
그러다가 부두 노동자들의 고충은 점점 커진다. 사람은 불확실성을 아주 싫어하고 껄끄러워한다. 노동자들도 불규칙적인 일거리가 많았을 것이다. 어떤 날은 부패성 강한 물건을 빨리 날라야 했지만, 어떤 날은 일감이 전혀 없었을 것이고 어느날은 물건이 잔뜩들어와 과부하의 노동력이 필요한 날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무역이 활발하지 않아 변동폭이 컸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그래거 하역인부들, 트럭기사들, 창고관리인들 모두 부두 근처에 지역사회를 이루고 공감대를 형성하여 노동자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세력을 확장시켰다. 항구에는 매일 인부들의 일자리 쟁탈전이 벌여졌다. 그러면서 그들은 노동조합을 구성하고 일정한 노동력을 점유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정부와 회사측과의 충돌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 단원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후크라고 불리는 인부들의 도구이다. 이것은 자루나 상자에 꼽거나 걸어서 무거운 짐을 한손에 들도록 고안한 장치인데,피터팬에 나오는 후크 선장이 오늘날 악덕하고 흉측하게 그려지는 것도 과거 험악했던 부두노동자의 이미지가 투사되어 그려진다는 짧은 생각을 했었다. 그렇지만 그들도 컨테이너의 출현에 의해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하주들은 싼 운송에 좀도둑질이나 물건의 훼손, 보험료 등을 줄이고자 애썻고, 선주들은 보다 큰 선박을 지어 항구에서 하릴없이 서 있지 말고 제발 바다에 나가 오랜시간 경제 활동을 해주길 기대했다. 트럭 운전자들은 몇시간이나 허송세월하지 않고 바로바로 짐을 실어 나가기를 원했다. 서업 관계자들은 항구의 교통과 운송과정이 속 시원히 풀려 모든 움직임이 원할 해지길 희망했다"-p.61
이렇듯 과도한 노동조합의 변덕과 불합리한 요율로 인해 컨테이너의 필요성이 운송의 중심층으로 부터 출현한다.
3. 대단한 어느 트럭기사
말콤 퍼셀 맥린, 운송의 패러다임을 뒤흔든 사람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운송되는 각 제품은 요율을 정해 받고 있었다. 사과면 1톤당 몇센트 농작물은 1톤당 몇센트로 그 당시에는 인부들이 들때마다 내용물을 확인을 할 수 있었으므로 제품별 요율을 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정하는 것도 노동조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므로 불합리하기 짝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인식하고 어떻게 바꿔야 할지 생각하고 행동한 한 사람은 젊은 나이에 트럭을 모는 기사였다. 그는 문명이라곤 아주 멀리 있는 마을에서 자라났고 맥린은 자신이 호르이쇼 앨저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고백했다. 어린 나이에 기차역으로 보내 퀘짝으로 계산해 돈을 떼어주면서 계란을 팔게했던 엘저의 삶처럼 부유하지도 부족하진 않았지만 자신앞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되었던 어린시절을 살았다.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세계 대공황 속에서 인맥으로 식료품 가게에서 일을했다. 그가 20살이 되던해 트럭기사가 45키로미터의 거리에 물건을 건내주면 5달러를 받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성공의 길을 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녹슨 트레일러 1대를 대차받아서 맥린트런 운송회사를 창설했다. 종업원은 자기 자신이었지만 그의 사업가적 수완을 발휘하여 1935년 겨우 22세였던 맥린은 트럭으로 물건을 운송한지 1년 밖에 안되었지만 트럭 2대 트랙터 1대 각자의 트럭을 소유한 노동자 9명을 거느린 사장으로 변신해있었다. 그리고 그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162대의 트럭을 소유하고 사업루트도 확장되어있었다. 34세의 갑부 맥린은 이것을 시작으로 여겼을 뿐이다. 몇년뒤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남겼다.
"신기하게도 내게는 발전의 기회가 찾아오고, 또 찾아오고, 또 찾아왔다. 이는 비교적 소규모인 회사를 대형 트럭 운송회사로 만들어주었다." - p. 68
그는 운송루트를 살 수 없으면 루트를 빌리는 권리는 사는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거점을 확보하였다. 현대 재무적 용어로 '옵션(Option)'을 행사하거나 '레버리지(Leverage)'를 이용한 기술을 발휘했다. 그러가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핵심 동력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 처럼 비용을 절대적으로 감소해나가는 것이 맥린사의 성공비결이었다. 지금의 페러다임에서는 비용의 저감(低減)노력은 회사의 당연한 노력이지만 그 떄 당시의 많이 남겨먹는 장사의 당사자들은 오히려 불필요한 고통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트럭 운송회사의 세일즈맨은 잠재적인 고객을 방문하고, 운송 목적지들까지 얼마 정도의 짐을 실어 나를 수 잇는지 파악한뒤, ICC의 요율에 따라 확보한 트럭으로 얼마의 지출이 예상되는지 연구해낸다. "-p.70
이것이 맥린 회사의 핵심적인 세일즈 방식이었다. 그래서 ICC의 공인 요율을 따라야하고 수지를 맞춰야 하는 어려움은 물론 존재했다. 회사가 장사를 하는데 고객을 위해서 손해를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맥린사는 기존의 트럭들이 휘발유 엔진을 사용했지만 맥린사는 트랙터의 디젤 엔진을 최초로 사용한 최초의 기업이기도 했다.그러가 그의 사업적 그릇은 트럭에 머무르지 않고 넓은 바다로 향한다. 그래서 그는 워터맨사라는 회사를 타겟으로 삼는다. 그리고 인수 방식은 LBO(Leveraged Buy Out)으로 최초로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인수한지 2개월 만에 400만 달러를 다른 사업체에서 조성해 은행빚을 다 갚아버렸다. 그리고 그가 생각해왔던 컨테이너 사용은 맥주를 브레이크 벌크 방식으로 운송할 떄 보다 94%나 저렴한 방법으로 이용했다.-컨테이너의 비용까지 계산에 넣은 것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는 컨테이너를 주문할 떄도 상선의 개조를 주문 할 떄도 추상적이거나 개념적으로 접근하기보다 구체적이고 계획적으로 설명했다. 즉, 그의 머리 속에서 철강박스가 배에 어떻게 실리게 되고 이것을 싣고 내리는데 어떠한 과정이 이뤄지는지 그리고 부두에서는 어떠한 방식으로 대처하거나 배가 어떻게 얼마나 정박해야 할지가 머리속에서 하나하나 재연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한 머릿 속에서 나오게 된 컨테이너 선은 아이디얼 X호였다. 물론 부두의 운송방식에서는 1929년에 벌써 시트레인사의 거대한 크레인들이 열차의 유개화차를 올리고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기업들이 화물을 컨테이너에 적용시키려고 시도했지만, 궁극적으로 운송 경제를 바꾸지 못했고 널리 보급되는 결과도 낳지 못했다. 그러므로 멕린기업과 이후에 나오게될 맥슨사가 운송의 메커니즘을 시스템적인 사고를 통하여 혁신을 이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4. 컨테이너 시스템
맥린기업의 컨테이너 시스템은 사고보다 행동을 우선적으로 하여 민첩하게 컨테이너 시스템을 보급시켰다면 미국의 반대편인 서부에서는 맥슨사가 학문적이고 연구의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컨테이너 시스템을 꾸며나갔다.맥린 기업은 부두의 하역을 원할히 하기 위해 기존의 크레인을 개조하고 컨테이너도 생산해내어 곳 바로 적용시켜나갔다. 그래서 이런 기업에는 현업을 기반으로 하는 수석 연구원들이 활약했다. 반면, 맥슨사는 대학 교수나 연구원들의 자동화 분업이 가져다 주는 이점을 확인하고 실험실에서 그들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웰던이라는 교수는 맥슨사를 도우면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운송회사들은 최상급 컨테이너 시스템을 이루기 위한 정교한 장비체제에 나름대로의 애착 이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총체적인 수송 운영의 경제체제를 뒷받침할 만한 컨테이너 사이즈 등, 전체적 특성에 관한 자료는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p.101
즉, 맥슨사는 연구소에 있지만 산업 현장에서 적용되지 않거나 방향성 없는 연구를 지양했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양사 모두 기존의 노동력에 의지한 운송시스템의 불합리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고 사견을 덧붙이면 기계는 인플레이션에 강하다라는 점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맥슨사는 맥린의 기업인 팬애틀랜틱사의 크레인을 보고 약점을 찾아냈고 그것을 보완한 크레인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문제는 다시 컨테이너로 쏠렸다. 바다위에 떠다니는 컨테이너 선안에서 컨테이너가 겹겹히 포개어지면 바닥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응력을 알아내었다. 그리고 맷슨사는 길이 3.3미터 너비 2.55미터 길이 7.2미터로 팬애틀랜틱사의 컨테이너보다 3.3미터 짧은 컨테이너를 만들어 냈다. 맷슨사는 실제 산업 현장에 적용해본 결과 400톤의 짐을 다루는데 1시간만에 옮길 수 있었다. 이런 생산력은 기존의 권양기와 하역인부들이 떼를 지어 작업 할 떄 보다 40배나 높은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짐을 실을 경우 배의 중력 중심을 감안해 무거운 컨테이너 화물을 무조건 아래에 깔기로 했다.
맥린은 한번의 위기가 찾아온다. 이것은 그가 회사의 운용했던 공격적 운영에 원인있었다. 그는 많은 자산을 투자해 푸에르토리코항에 서비스를 하려고 했찌만 정치적 경제적 목적과 푸에르토리코의 하역인부들의 반발로 인해 위기에 처한다.그는 그가 벌어놓은 잉여금을 2년 만에 날리지만 뉴어크에서 캘리포니아로 운송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허가를 따낸다. 그의 회사는 시랜드사로 바꾼 상태다. 그는 자국의 수익성있는 항로를 따내고 푸에르토리코의 무역도 설득끝에 따낸다. 1962년 회사가 보유한 컨테이너는 7848개, 섀시는 4876대, 트랙터는 386대나 되었다. 그리고 3년뒤 총 15개의 항구에서 15개의 컨테이너 화물선을 가동시켰다. 즉, 그의 목표를 향한 집념이 위기를 기회로 바꿔놓은 것이다.
5. 뉴욕항의 결사 투쟁~7. 세계표준을 향하여
5장부터 7장 까지는 이른바 경제 개입주의와 노동조합의 불합리성을 말한다. 노동조합은 그들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컨테이너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앞에 무기력하게 쓰러져 간다. 물론 그들이 불리한 대우를 받으며 자리를 뺴앗긴 것은 아니다. 후생복지나 정년 연장과 같은 사회안전망을 만들어내는데 가장 큰 몫을 해냇다는 사실은 반박할 여지가 없다. 또한 세계 표준을 향한 정부의 노력은 눈물 겹지만, 그들이 행하는 시행착오는 다분히 비경제적이고 본능적이고 즉흥적이었다. 그리고 회사들의 자기의 이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고집 때문에 컨테이너의 역사가 어떻게 느려지고 큰 비용이 들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5장에서 한가지 주목하고 싶은 대목은 브레이크 벌크와 같은 포장이 되지 않아 허술해 보이는 물건은 과거에 많은 절도 행위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반면 컨테이너 시대로 왔을 때 인부들이 줄어들어 제품의 소실 가능성도 줄어든 것이 있지만 이전의 많은 도난사건은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깨진 유리창 효과'로 대변된다. 작은 물건, 허술한 보완은 인간으로 하여금 절도를 충동질한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7장에서는 많은 기간과 시행착오 끝에 컨테이너의 세계 표준이 정해지게 되는데, 3,6,12미터 길이의 컨테이너가 정해진다. ISO 혹은 Global Standard로 대변되는 세계표준이 정해지는 순간 세계의 운송 패러다임은 급속히 전환하게 된다.
8. 컨테이너 시대의 출발
맥린의 사업가적 수완으로 개조된 상선 아이디얼X호는 컨테이너의 무한한 잠재성을 소개만한 화물선들이었다. 이후에 등장하는 게이트웨이 시티호, 하와이안 시티즌호가 컨테이너무역의 촉매적인 역활을 하면서 컨테이너 시대의 출발을 알린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해운업에 종사하는 사업가들에게는 비용이크고 한때 유행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으므로 1962년 뉴욕항구의 컨테이너 무역비중은 8%에 지나지 않았다.
1950년도에도 발달된 화물운송의 제도는 있었다. 이른바 피기백이라는 것으로 기차에 트레일러셰시를 달고 화물을 운송하는 것으로 오늘날 보이는 기차화물 패러다임의 기원이 된다. 이러한 것은 기차와 트럭사이에 경제적으로 적합한 화물을 분담하도록 돕게 되고 선박이 들어가지 못하는 지역에 화물을 운송하도록한다. 경제적으로도 피기백 운행에 900키로미터 거리에서 실시될 때부터 전통적인 트럭운송보다 훨씬 저렴하고 장거리로 갈 수록 기차의 단위당 비용체감이 크게 이뤄져서 많은 주목을 받는다. 피기백시스템에서도 한가지 화두가 되는 것이 있는데 국제표준, 국내 표준을 빠른 시간에 합리적으로 정하는 것이 얼마나 국가에 도움이 되는지 설명하고 있다. 1959년 미국표준화협회의 컨테이너 사이즈는 정책통과에 걸림돌로 인해 지연되었으나 캐나다는 이미 표준화를 적용하여 화물 대차 시스템(피기백)을 유용히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국제무역에 도움을 주는 것은 1960년대부터 운송회사들의 적극적인 컨티이너와 피기백 시스템 활용에 있다. 이러면서 느낀 점은 미국은 사업가적 기질, 자본투자에 얻어지는 리턴(수익)에 의해 발전하는 국가라고 느꼈다. 그러나 완성된 형태로 보이는 피기백 시스템도 한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컨테이너를 집을 때 분리 가능한 트레일러를 실지만 그곳의 바퀴는 분리 되지 않는 점이었다. 비유를 하자면 선박->기차->트럭 의 운송관계에서 선박에는 컨테이너만 기차에 실을 땐 피기백 시스템이 사용하는 트레일러 셰시를 그리고 그에서 때어내어 트럭에서는 다른 트레일러 셰시를 꺼내서 결합해야된 다는 점이다. 기차 선로와 도로가 같을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러나 이러한 맹점을 간파한 맥린의 시랜드사나 맷슨사는 바퀴분리가 되는 컨테이너를 1960년대부터 0사용하고 있었다. 그러한 선발기업의 이득은 1964년 총수익 9400만 달러(현재가치 7억5000만달러,한화 8000억원)상당을 달성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번에도 흥미를 끌었지만 다른 경쟁기업들은 여전히 한때 유행같은 컨테이너를 사거나 사업루트에 적용할 행동은 하지 않았다. 금융시장에서도 이러한 경우가 눈에 띄게 많다. 약 2달전에도 이러한 경우를 봤다. 어닝 서프라이즈를 낸 POSCO를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투자를 하지 않는다.-45만원정도의 높은주가도 진입장벽으로 강하게 작용하겠지만- 그러나 투자자들은 한물간 철강업이라고 말하곤 한다. 일명 페타 꼼블리 현상으로 시각화 가시화 되지만 그것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 컨테이너 개혁은 안타깝게도 한때 유행인 테마가 아니라 운송에 있어서 필수조건이었고 패러다임 점프였다. 지금까지 임금비용의 절감을 90% 달성한 적은 없었고 컨테이너가 아직까지 표준화 되지 않았지만 컨테이너의 운송 과정은 체계적이고 시간이라는 비용을 극단적으로 감소시켜줬다. 그러면서 비용을 감소시켜주는 명약인 컨테이너에 맞게 제조업체들도 공장을 재정비 시작했다. 언제나 블루오션에는 Risk가 커보이지만 실제로 다가서면 자본의 비용부담이 생각보다 적다는 것이다. 그만큼 수요가 없고 접근성도 좋지 않기 때문이다. 맥린을 필두로한 운송 개혁자들은 정부로 부터 헐값에 사들인 상선으로 해운사업을 시행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 많은 경쟁 해운사들이 항만크레인을 이용한 컨테이너 무역을 하기 시작했고 선발 기업 또한 느려터진 컨테이너 선으로는 더이상 주위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지 못했다. 그러면서 맥린은 컨테이너 전용선박이나 화물회사들을 사들여 6000만달러의 빚을 이용한 경영을 한다. 그리고 러드위그라는 세계 최대의 갑부중 한명이 버린 껍데기 해운회사를 지금의 주식 교환방식으로 사들여 현금을 확보한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여 많은 군수물자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컨테이너의 왕래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그러면서 트럭과 기차,선박 오늘날 흔히 보는 항만부두 앞에 기차선로가 컨테이너 병풍을 따라 서있는 광경의 상황적 기반을 제공한다. 결국 맥린의 차입급을 이용한 경영이 이번에도 무사히 성공으로 끝나게 된다.
9 베트남
1965년 겨울, 미 정부는 베트남에 미군기지를 서둘러 짓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군 역사상 병참학적으로 가장 취약점을 안겨주었지만 컨테이너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촉매였다. 이말은 게릴라에 취약하고 이른바 All in성 공격에 취약하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족 현상을 인적,자원적 공급 물량으로 해소해 갈 수 있다는 해결책이 제시되면서 컨테이너를 통한 보급품 수송이 운송에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보내는 것만 많이 보낸다고 해서 받는 쪽에서 받아들이지 못하면 적체 현상과 같은 문제점이 발생한다. 적체 현상은 배가 화물을 싣고 항구에서 하역을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베트남의 부두를 크레인을 가진 신식 부두로 건설해나가면서 운송의 비용을 엄청나게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계기였다. 즉, 경제학적인 문제와 병참학적인 문제를 컨테이너라는 페러다임으로 극복해냈다. 이것을 안 미국은 컨테이너 운송 메커니즘을 전세계로 퍼트리는데 적극적인 원조를 한다. 그러나 베트남과 미국과의 운송은 보내는 곳에서는 수익이 됫지만 돌아오는 물품들은 비용을 매꿔주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1967년 맥린은 베트남에서 돌아오는 항로에 자신의 컨테이너 선을 채우고 올만한 나라를 물색한다. 그곳이 일본이었다. 그래서 미쓰이 그룹과 합작하여 미국과 일본간의 컨테이너 무역의 활로를 개척하고 이후에 맷슨사가 N.Y.K 회사와 합작하여 1968년 9월 미국으로 처녀항해를 했다. 그리하여 1968년 말이 되자 매달 7000톤 이하의 동진 화물 서비스 실시에 있어서 7군데의 회사가 경쟁상태에 돌입했다. 이러한 성장세로는 글로벌 경제가 컨테이너에 힘입어 오픈의 빵처럼 크게 부풀어 갈 것 같았다.
10. 폭풍 속의 항구들
생산과 투자와 소비 이러한 자본주의 속의 일련의 과정은 부의 이동(Money Move)로 인해 이뤄진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자원의 가치(M)으로 매긴다면 공장에서 생산과정 투자과정을 거친 가치는(M') 원래의 가치보다 크다. 물리학적으로는 오히려 구조의 변화는 엔트로피라는 비용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공장에서는 노동력(L)이 투입되고 노동자들은 임금(R)을 받는다. M'의 가치를 증가 시키려면 L이 R보다 커야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발상은 마르크스라는 경제학자가 했지만 오늘날 대중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막시즘=나치즘,공산주의는 위험한 것이라는 직관적 이미지를 주입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발상은 오늘날에도 크게 틀리지 않았다. 컨테이너 운송 시스템도 이러한 부의 이동의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컨테이너 화물 운송이 확장됨에 따라 해운 관세도 소수의 대규모 항구에 주로 거둬질 것이었다."-p.290
이러한 해운산업의 집중화 클러스터화는 돈이 투입될 수록 빠르고 강하게 이뤄진다. 이러한 대표적인 미국의 항구는 LA로, 이곳도 신식 부두와 창고들 건설에 투자가 몰린 곳이었다. 이러면서 운임요율의 표준도 바뀌어 간다. 컨테이너 화물 1톤당 얼마라는 개념을 벗어나 컨테이너 임대료를 생각하는 항구도 있었다. 나는 부의 이동을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다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생존권을 박탈하려는 무시무시한 괴물이고 불합리한 구조라는 것에 대해선 인정한다. 그리고 중요한 용어가 나온다 미니맥스(MiniMax)이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성과가 경제학의 큰 해결과제라면 단기적이고 국소적인 경제분야에서는 미니맥스를 중요시한다. 미니 맥스는 극대치 중의 최소치 원리이다. 맥린의 시랜드사가 오클랜드항에서 경유 화물운송을 가속화 시킬 수 있게 작용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화물량이 늘어나면 지불금이 늘어나겠지만, 어느 일정량이 되면 추가 지불금을 내지 않을 권리가 생긴다는 발상이 미니맥스의 발상이다. 지리학에서 배우는 '극한의 량이 되면 상승이 체감한다'라는 말과 일맥 상통한다.
11. 호황과 파탄 ~ 12. 거장 말콤 맥린의 움직임 ~ 13. 하주 업체의 복수
맥린은 사회 초년생부터 성공의 기회를 빠짐없이 잡아나갔고 위기를 기회로 삼는 경영 철학으로 컨테이너 운송과정에 최고의 공로자였다. LBO, 합자회사, M&A라는 현대 경영학에서 쓰이는 용어를 직접 생각하여 실행하고 성공적인 사례를 만들었다. 마치 컨테이너를 쓰지 않는 기업은 내가 매수하여 쓰게하고 다시 팔아서 다른 기업으로 옮겨다니는 자본가적인 기질도 지녔다고 느껴졌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타이밍(Timing)의 귀재라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성공한 방식, 타이밍, 사업가적 수완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만 Risk Management적으로 아주 취약하다고 느꼈다. 개별 기업으로는 그의 기업은 작은 위험은 커다란 성장의 기회를 안겨주는 차입 경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작고 직접적인 수익에 빠져들게 되어있는 법이다. 그는 여러척의 컨테이너 선과 많은 회사를 거느리고 활발한 운송경로를 개척하는데 강한 면모를 보였지만 해외 물동량이 레드오션이 되는 것과 유가의 움직임을 파악하는데 실패하였다. 즉, 글로벌 경제의 외생변수를 인식하지 못하였다. 먼저 유가는 급등하여 그가 새롭게 만든 빠르고 기름많이 먹는 배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보다 골칫거리로 전락했으며 LBO 방식의 기업합병은 본사의 현금흐름이 악화되면서 실패로 끝나버렸다. 그러나 그가 이룬 업적이 워낙 큰지라 이러한 악천후 속에서도 그는 그가 가진 주식을 모두 팔고 7977년 2월, 조용히 레이놀즈 기업 이사진 자리를 떠났다. 회사의 경영진과의 불협과 평탄치 않은 결혼 생활에 몹시 불안해했다.
"저는 건설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경주자들이지요. 건설가가 경주자들 사이에 낄 수는 없는 문제 입니다.좋지 않은 상황에 내모는 것과 같지요."-p.350
시랜드사에서 하루도 뺴먹지 않고 책임을 다해왔지만, 말콤 맥린은 1970년 이 회사를 느닷없이 포기해버렸다. 그리고 그는 최종적으로 유나이트 스테이츠사를 인수하여 다시 컨테이너 사업에 발을 담근다. 1970년대는 항만부두가 규모의 영향력으로 민영화가 이뤄진다.
항구의 규모가 클수록 큰 규모의 배를 다룰 수 있고, 큰 크레인 덕분에 화물도 신속하게 비울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화물을 재장전해 바다로 보낼 수 있다.-p.357
이것은 규모의 경제를 뜻하는 것이다.
총비용을 따져 운영비와 항구 사용료, 내륙 운송요율에 따라 어떤 화물운송 복합매체를 써야 가장 저렴하게 화물을 운송할 수 있을지 결론지은 뒤에야 도착지가 정해지기도 했다.-p.358
해운회사가 운송매체의 조합을 통하여 비용을 계산한다는 발전은 컨테이너가 없었다면 표준적인 화물운송이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불가능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즉, 한 운송매체를 고집하여 배달하는 정통에서 벗어난 무역양상을 초래한 것이다. 12장의 끝 부분에 보면 한국 조선업의 이야기가 잠시 나온다. 거장 말콤 맥린은 쾨물 컨테이너선을 주문하는데 이것을 수주 받은 회사는 대우조선소였다. 그렇지만 말콤 맥린은 이로인해 미국 정부의 지원금을 놓치지만 그의 계산에는 이미 이러한 비용을 인지하고 있었고 대신 정부의 간섭 없이 원하는 루트를 설정할 수 있었다. 1984년 6,200만 달러 수익을 올린 맥린기업으로 부터 다음해 6,700만 달러라는 산업 손실액에 관한 소식이 전해진다. 이러한 이유는 석유가격의 폭락으로 규모가 크고 느린 배를 가진 기업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다. 안타깝게도 맥린이 보유한 크고 느린 배는 자신의 기업을 타격을 입혔다. 그로 인해 유나이티드 스테이츠사는 붕괴되었다.
맥린은 이후 칩거생활에 들어갔다. 언론을 피하고 공공장소에 절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자신이 실패하여 수천 명의 사람이 다쳤다는 사실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 것이었다. 그러나 시랜드 경영자들 중 몇명은 그에게 공식선상에 모습을 보이라고 설득하고 그의 공로를 기리는 명예와 상을 받으라고 권했으나.그러나 2001년 5월 30일, 그의 고별식(장례식)날 아침 그의 기억속에 있는 전 세계의 모든 컨테이너 화물선들이 신음했다.
한 회사의 파산은 미래의 밝은 전망으로 변하는 순리대로 컨테이너 화물운송은 상당히 규모가 큰 사업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리고 컨테이너 사업이 발전될수록 화물을 움직이는 비용은 점차 줄어 들고 있었다. 13장을 읽으면서 책의 내용을 곱씹어 봤다.
비용의 절감은 많은 사람들을 일자리로 부터 자유를 준다.라는 말이 떠올랏다. 또한 BD(발틱 운임지수)I가 감소해도 운송비용의 절감하므로 세계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컨테이너 매커니즘은 미국의 달러를 수출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그리고 하주는 1차적 컨테이너 서비스의 소비자였기에 운송시스템이 변화하면서 큰 비용절감을 이뤘다. 그리고 정통 화물에서 쓰이던 전략 소규모 사업을 다양한 지역에 분산하는 전략은 규모의 경제를 실현시키는 걸림돌로 작용하여 많은 구식 해운회사는 고배를 마셨다. 또한 모든 업종은 규격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게 큰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정부의 규제는 유치산업에서는 효과적이고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만 청년기에 들어선 기업들을 법적 규제를 하는 것은 과잉보호가 될 가능성이 높고 법적 규제를 헤체하여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오히려 좋은 발상이라고 느꼈다. 1988년 운송비용은 미국고객들에게 87.3%라는 화물운송비를 절감시켜주었다.
14. 저스트 인 타임(Just In Time)
1980년대 전세계가 JIT 시스템, 적기 생산 방식 또는 간반방식을 발견하면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때 부터 세계는 무역을 통하여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보낸다.제조 업체들은 정확한 시간과 엄격한 체제 아래 배달을 강행해주는 소수의 운송 서비스 회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자 했다. 이러면서 컨테이너(Container),컴퓨터(Computer),국가(Country)의 3C를 기욱하면서 세계 경제는 통합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글의 끝부분에 느낀 점이 있다면 지금의 컨테이너 물동량이 가장 많은 곳은 홍콩,싱가폴,상하이,선전,부산 이다(2003년 기준). 아시아의 머니무브가 이미 이뤄졌고 이러한 양상은 극단적이라고 할 만큼 치우칠 것으로 지켜본다. 중국이 작기때문에 미래가 없다는 말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명제이므로 이러한 곳에 투자는 미래에 통찰로 여겨질 만큼 중요하다고 본다.
'내 서재속에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폴레온 힐 성공의 열쇠 - 나폴레온 힐 저 (0) | 2012.12.04 |
---|---|
포지셔닝- 잭 트라우트와 앨 리스 (0) | 2012.12.04 |
넛지(Nudge)-리처드 탈러, 캐스 선스타인 지음 (2) | 2012.12.04 |